1920년대, 골프에 빠져 있었던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

조선귀족들의 골프 삼매경

 

조선귀족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아들 이항구(李恒九)는 골프에 매우 심취해 있었다. 1920년대에 종묘에 보관된 어보를 분실했을 당시에도 무책임하게 골프를 치러 다니며 취미를 넘어 중독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통에 비난을 받았던 일화가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 (관련 글: 종묘의 어보 분실 사건)


아래 1928년 3월 22일 자 매일신보 기사 속에서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보지도 못했을 ‘골프’를 즐기는 극소수 조선귀족들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취미인 순례기(趣味人巡禮記)
– 평민적 귀공자는 골프장에서 활약, 한번 재미들이면 놓지 못한다.
– 이항구, 문대식 두 사람

스포츠 중 가장 고급 취미 중에도 가장 실익을 주는 놀음은 ‘골프’이다.

백만장자로 한일은행 두취(頭取, 은행장) 민대식(閔大植, 1882~?) 씨는 지금 골프 클럽에 유수(有數)한 선수로 토요일, 일요일에는 한 번씩 청량리로 자동차를 몬다.

경성 골프클럽에 회원은 130인가량이나 되나 그중에 조선사람으로는 이왕직 장시사장(掌侍司長) 이항구(李恒九, 1881~1945) 씨와 민대식 씨 그 외에 김한규(金漢奎, 1877~1950), 안순환(安淳煥, 1871~1942)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중에도 이항구 씨는 가장 오래된 골프 예찬자로 골프채를 잡은 지 6년 유여(有餘)! 조선 골프계에서는 가장 구군(舊軍)에 속하는 것이다.

조선귀족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아들 이항구(李恒九)는 골프에 매우 심취해 있었다. 1920년대에 종묘에 보관된 어보를 분실했을 당시에도 무책임하게 골프를 치러 다니며 취미를 넘어 중독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통에 비난을 받았던 일화가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 (관련 글: 종묘의 어보 분실 사건) 1
▲ 민대식(좌), 이항구(우) 【매일신보 1928.03.22】


작년까지도 이항구 씨는 위원장이었으며 모여있는 이가 대개는 관민의 대표적 인물들 뿐이라. 이항구 씨의 사교적 지위는 이것으로써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는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민대식 씨는 작년부터 골프에 맛을 들였으나, 그 수법이 매우 묘하여 한 바퀴 두 바퀴 골프 그린을 도는 동안에는 은행 회계도 채권 정리의 고뇌도 모두 잊고 청춘시대에나 돌아간 듯이 오직 유쾌한 시간을 계속할 뿐이라 한다.

골프는 돈이 드는 놀음이다. 청량리 골프장까지는 자동차를 타야 하고, 기구도 또한 돈 100원 들여서는 시원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함으로 골프는 부르주아의 놀음이라고 하나 사유재산을 시인하는 시대에 부르주아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며,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부르주아들에게도 그들에게 맞는 취미와 운동이 필요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어쨌든 골프에 재미를 붙이는 게 최후이다. 한번 재미만 붙여놓으면 여행을 가더라도 그 가는 곳에 골프장이 있으면 귀골(貴骨)들도 서슴지 않고 그 무거운 골프 도구를 어깨에 메고 나선다. 이 점으로 보아서 골프에 재미 붙인 귀공자들은 그야말로 귀공자 중의 평민적이라고 볼 수 있다.

휴일만 되면 이항구 씨는 의례히 골프채를 둘러메고 원산(元山)으로 간다. 민대식 씨도 금년 여름에는 어디든지 골프 원정을 갈 기세이다.

 

조선인 최초의 골퍼, 이항구

 

기사를 통해 조선에서 골프를 즐기는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며, 단 네 명의 조선인 유력자들만이 골프를 취미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는 ‘구력 6년’이라고 하니 최소 1922년부터 골프장에 발을 들인 것으로, 이는 ‘기록상으로 남아있는’ 조선인 최초의 골퍼이다.

 

한편 영친왕 내외는 1927년 5월에 10개월간 유럽여행을 하였는데, 이때 스코틀랜드의 골프 성지 세인트 앤드루스 등지에서 라운딩을 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즉 영친왕은 ‘최초로 해외 골프 라운딩을 한 조선인‘이다.

 

조선귀족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아들 이항구(李恒九)는 골프에 매우 심취해 있었다. 1920년대에 종묘에 보관된 어보를 분실했을 당시에도 무책임하게 골프를 치러 다니며 취미를 넘어 중독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통에 비난을 받았던 일화가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 (관련 글: 종묘의 어보 분실 사건) 3
▲ 하코네마루(箱根丸) 갑판에서 스윙연습을 하는 영친왕 【동아일보 1927.11.10】

 

기사 속에 등장하는 청량리 골프장은 1924년 말에 폐장한 효창원 골프장을 대신해 청량리 뒷산에 새롭게 신설된 곳이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효창원 골프장은 경치와 지형변화가 많아서 골프 경기에는 적당하였으나 초심자들에게는 어려운 코스였기에 9개의 홀 중 7개 만이 사용될 정도로 비효율적이어서 청량리 골프장이 설립되자 폐장 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건설비로 5만 원의 예산을 들인 청량리 골프장은 1924년 12월 6일 완공되었고, 교통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자동차회사와 특약을 하여 동대문~청량리까지 구간을 1원의 교통비를 받고 왕복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청량리 골프장 내에는 식당과 기타 부속건물이 들어섰으며, 골프장까지 이어지는 도로도 모두 완공된 상태였다. 하지만 잔디가 아직 고르게 나지 않아 다음 해인 1925년 봄에 정식으로 개장식을 가졌다.

 

조선귀족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아들 이항구(李恒九)는 골프에 매우 심취해 있었다. 1920년대에 종묘에 보관된 어보를 분실했을 당시에도 무책임하게 골프를 치러 다니며 취미를 넘어 중독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통에 비난을 받았던 일화가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 (관련 글: 종묘의 어보 분실 사건) 5
▲ 일본 골프계의 선구자 이노우에 마코토(井上信, 1885~?)가 효창원 골프장에서 스윙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원 안의 오른쪽은 제3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 1873~1947)이다. 【매일신보 19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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