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놀라게 한 지독한 구두쇠들 이야기
진 폴 게티(Jean Paul Getty, 1892~1976)
미국의 대부호 진 폴 게티(Jean Paul Getty)는 한국에서는 고흐, 루벤스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굴지의 미술관 ‘게티 미술관의 창립자’로 더욱 유명하다.
그는 1950년대에 주식투자와 석유 사업으로 거대한 부를 쌓으면서 1966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하는 등 1976년 사망할 당시 남긴 재산은 무려 20억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게티는 당대에 자신의 저택에 ‘유료 공중전화’를 설치할 정도의 악명 높은 검소함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 1958년 2월 24일, 타임지 표지
더 유명한 이야기로는 자신의 손자 게티 3세(John Paul Getty III, 1956~2011)가 1973년에 로마에서 유괴되었을 때 범인들이 요구한 1,700만 달러의 몸값 지불을 거부한 사건이 있다.
엄청난 부자이니만큼 쉽게 돈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게티를 ‘과소평가’한 유괴범들은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손자의 귀를 잘라내고 언론을 통해 공개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게티는 220만 달러의 금액을 지불하였다.
▲ 진 폴 게티(Jean Paul Getty)
훗날 알려진 자세한 사정은 더욱 놀라웠다.
당시 게티가문이 벌어들이는 부는 아버지 폴 게티가 독점한 관계로 아들은 월 100달러를 받는 월급쟁이에 불과했다. 그는 아들이 납치당하자 아버지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차갑게 거절당했다.
“나에게는 14명의 아들과 손자가 있는데 1명에게 몸값을 줄 경우 나머지 13명도 계속해서 납치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 거절 이유였다.
실제로 당시 재벌들을 상대로 몸값을 노린 납치가 대유행하던 시점이라 ‘범죄자들과 타협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지만, 이후의 모습을 보면 단지 구두쇠에 불과한 행동들로 추정되고 있다.
▲ 귀가 잘린 게티 3세
귀가 잘리고 추가 협박장이 날아오자 그제야 놀란 게티 1세는 납치범과 직접 협상하여 액수를 220만 달러까지 깎았다. 액수를 깎은 이유는 세금공제가 220만 달러까지만 가능했기 때문이었으며, 심지어 이 돈을 자신이 지불한 것이 아닌 아들에게 연 5%의 이자로 빌려주기로 하고 지불했다.
비록 구출되었지만 어린 나이에 충격적인 일을 겪은 게티 3세는 공포를 이기기 위해 마약에 중독됐고, 결국 8년 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시력상실과 전신마비를 겪었으며 이후 30여 년 가까이 허울좋은 재벌 3세로 폐인처럼 지내다가 2011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전신 마비로 고생한 게티 3세
존 엘위스(John Elwes, 1714~1789)
존 엘위스(John Elwes)는 지난번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한 영화 캐릭터들(관련 글)‘에서 다룬 바 있다.
▲ 존 엘위스 초상화
실존했던 정치가였던 그는 엄청난 재산에도 불구하고 누더기를 입고 폐허 같은 집에서 촛불을 아끼기 위해 해가 지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 평생을 검소하게 살면서 재산을 거의 쓰지도 않고 사망했고, 그의 재산은 혼외 자식들인 두 아들에게 남겨졌다.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 1926~2018)
글로벌 가구업체 이케아(Ikea)의 설립자인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는 생존 당시 약 60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처럼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재산의 보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검소함은 아주 유명했다.
캄프라드는 비행기로 이동할 때는 언제나 이코노미 클래스를 이용하였고, 기차로 이동할 때는 2등실을 이용했다. 차의 티백을 여러 번 우려내고 식당에 가면 소금과 설탕 파우치를 몰래 챙기는 것은 잘 알려진 그의 모습이었다.
▲ 잉바르 캄프라드
또한 절대 비싼 호텔을 예약하지 않았으며 거주하는 집의 내부와 가구들도 단순하고 실용적이라 자신의 삶이 곧 이케아가 제작하는 가구의 정체성이었다.
이런 그의 구두쇠 생활은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캄프라드가 세운 ‘스티칭 잉카 재단(Stichting Ingka Foundation)’이라는 자선단체의 규모는 360억 달러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주로 세계적 부호이자 자선사업가로 변모한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의 269억 달러보다도 거대하다.
▲ 점점 커지는 이케아의 매장 면적
하지만 게이츠 재단의 돈이 빈국의 질병과 교육에 투명하게 쓰이는 모습인 반면, 스티칭 잉카 재단의 돈은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 분야의 혁신’을 위해 쓰인다고만 명기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재단이 세금을 내지 않고 M&A에 대한 방어를 용이하게 하고자 세운 허울좋은 재단일 뿐이며, 그것이 스웨덴 출신이면서도 IKEA의 사업지를 네덜란드로 옮긴 이유라고 추정하고 있다. (관련 글)
실제로 네덜란드에 있는 재단법인들은 운영 내역을 공개할 필요가 없으며, 결국 스티칭 잉카 재단의 배당금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헤티 그린(Hetty Green, 1834~1916)
월스트리트의 전설적인 여성 투자가 헤티 그린(Hetty green)이 1916년 사망 시 남긴 유산은 추정치 1억 ~2억달러(2023년 현재 가치 26억 달러~54억 달러)로 2007년 포브스지에 ‘역사상 최고의 부를 이룬 여성’으로 소개되었다.
퀘이커 교도였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누더기 옷이나 구멍 난 스타킹을 기워신는 등 검소함을 생활화하고 있었다. 13세 무렵부터 부친이 경영하던 포경 업체의 경리를 맡아 자금 관리에 있어서 산교육을 받았으며, 1864년에는 무려 750만 달러(2023년 가치 1억 4700만 달러)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이후 주식과 철도사업, 금융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경제 대공황 당시에는 뉴욕시에 긴급자금 110만 달러를 대출해 주며 파산에서 구해낸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 헤티 그린
경쟁자의 거래은행에 거액을 예치했다가 한꺼번에 인출해 파산시키기도 하는 등 뉴욕 금융가를 좌지우지하던 헤티 그린이었지만 사생활은 엄청난 구두쇠였다.
빈민층이 사는 브루클린의 임대 아파트를 전전하며 숙박료가 가장 싼 호텔만을 고집하였으며, 약을 살 때도 병값이 아까워 집에서 가져온 병에 약을 담았고 가스비를 아끼기 위해 요리하지 않아도 되는 오트밀 같은 식단을 고집했다. 또 조간신문을 빨리 읽은 후 아들을 시켜 신문을 되팔아오게 하기도 하였다.
▲ 헤티 그린의 옷차림
그중에서도 외아들 에드워드 하우랜드 로빈슨 그린(Edward Howland Robinson Green, 1868~1936)의 다리가 부러진 사건은 아주 유명한 사건이었다.
헤티 그린은 병원비를 아끼고자 집에서 민간요법으로 다친 아들의 다리의 처치를 하다가 상태가 악화되었으며, 그렇게 된 이후에도 병원비가 아까웠는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병원을 다니다가 치료시기를 놓쳐 결국 에드워드는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모두 아들 에드워드와 딸 해리엇에게 남겨졌는데, 에드워드의 경우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인지 모친과 달리 대저택과 호화 요트를 구입하는 등 사교와 유흥비로 엄청난 돈을 탕진하였다.
실제로 에드워드의 아내는 그가 사망한 후에 유언을 이행했는데, 바로 절단했던 다리를 묻었던 곳에서 다시 파내 시신에 접합하고 장례를 치른 것이었을 정도로 평생 한맺힌 사건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헤티 그린의 외아들 에드워드와 그의 아내
콜리어 형제(The Collyer brothers)
괴짜로 유명했던 호머 콜리어(Homer Rusk Collier, 1881~1947), 랭글리 콜리어(Langley Wakeman Collier, 1885~1947) 형제는 어린시절부터 같이 살던 집에서 죽을때까지 함께 했다. 나이가 들고 쇠약해지자 도둑이 두려웠던 그들은 모든 창문을 판자로 막고 집의 곳곳에 폭탄과 부비트랩을 설치했다.
이후 공공요금을 지불하지 않아 1917년에는 전화가 끊어졌고, 1928년에는 전기와 수도, 가스가 차례로 끊어졌다. 결국 형제는 석유난로와 자동차 엔진을 집의 난방에 사용해야 했다. 뉴욕시는 체납요금을 받기 위해 그들의 재산을 압류했지만, 형제는 ‘재산이 없다’고 주장하며 압류를 거부했다.
동생 랭글리는 밤이 되면 근처 공원을 떠돌며 빵이나 물, 음식 쓰레기등을 가져와 생계를 유지했다.
결국 이웃의 신고와 은행의 가압류 등으로 퇴거명령이 내려졌고, 경찰이 강제퇴거 절차를 시작하자 랭글리 형제는 말없이 6700달러(현재가치 12만 달러)의 수표를 한 번에 지불해 모든 빚을 일시에 갚아버리는 모습으로 ‘돈이 없어’내지 못한다는다는 변명을 무색게 하였다.
▲ 경찰과 다투는 호머 콜리어
1947년 3월 21일, 형제의 집에서 ‘시체 악취가 나는 것 같다’는 익명의 제보전화가 경찰에 걸려왔다.
경찰이 출동했지만 집은 진입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모든 창은 철창으로 막혀 있었고 오래된 신문, 의자, 박스 같은 쓰레기들로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기계로 뚫고 나서야 침실 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입구로 추정되는 통로
그곳에서 경찰은 심장마비와 영양실조로 사망한 형 호머 콜리어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낡은 목욕가운과 백발의 머리는 어깨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의자에 앉은 채로 머리는 무릎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망 시점은 10시간이 채 안 된 상태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악취의 원인은 아니었다.
▲ 호머 콜리어가 사망한 의자. 개인수집가에게 판매되었다.
경찰은 엄청난 쓰레기를 치우는 힘든 작업을 하며 수색을 계속했지만 결국 동생 랭글리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다. 현상 수배까지 내걸렸지만 랭글리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버스에 탑승하거나 카페에 있는 그를 보았다는 허위 신고만이 제보되었다.
▲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내부
이후에도 집의 쓰레기 청소는 계속되었고, 경찰은 3천여 권의 책과 오래된 전화번호부, 동물의 뼈 더미를 제거하고 피아노와 X선 기계 등 수십 톤의 물건들을 치워나갔다.
1947년 4월 8일, 쓰레기를 치우던 인부가 드디어 랭글리 콜리어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 랭글리 콜리어의 시신 발견을 전하는 뉴스
그는 형이 죽은 곳에서 불과 3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쥐가 부분적으로 시신을 갉아먹은 것으로 보였고 가방과 신문 등의 쓰레기들로 시신이 덮여있어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망원인은 거동이 불편한 형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다가 자신들이 설치한 부비트랩에 걸려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며칠 후 굶어죽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 내부의 물건들을 옮기는 인부들
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모았던 130톤에 달하는 쓰레기 더미는 경매에서 2천 달러에 판매되었다.
하지만 콜리어 형제의 부동산 가치는 91,000달러(2023년 가치 125만 달러)에 달했고 보석, 현금, 유가증권 등의 개인 재산도 2만 달러나 남겼다. 또 경찰은 쓰레기 틈 속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34개의 통장도 발견하였는데 총 잔액은 3,007달러(2023년 가치 41,503달러)였다.
두 형제는 부모가 있는 브루클린의 사이프러스 힐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집은 오랜 세월 유지 보수가 되지 않아 거주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어 폭파 철거되었고, 현재는 해당 주택의 자리에 콜리어 형제 공원(Collyer Brothers Park)이 생겨나 당시의 흔적을 전해주고 있다.
▲ 콜리어 형제 공원(Collyer Brothers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