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검사로 찾은 친아버지가 연쇄살인범으로 밝혀진 실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60대 여성 캐시 길크리스트(Kathy Gillcrist, 63)는 늘 자신이 입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살았다. 사실 이런 생각은 사춘기 시절에 잠깐 할 법 하지만 그녀의 의심은 나이가 들수록 날로 커져만 갔다.
연극 관람과 여행을 좋아하고 활달하며 애교 많은 자신과는 달리, 부모님 두 사람은 너무나 조용하고 소박한 성격으로 돌아다니는 것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
▲ 캐시 길크리스트(좌)와 부모
캐시는 2017년 은퇴 후 여가시간이 늘어나자 DNA 검사업체인 23앤미(23andMe)로부터 가정용 DNA검사키트를 구입해 유전적으로 가까운 친척들을 찾기 시작했고, 포틀랜드에 거주하는 수잔 길모어(Susan Gilmore)라는 ‘생물학적’ 사촌지간과 연락이 닿았다.
마침 수잔은 족보학자로 일하고 있었고, 덕분에 캐시의 생모에 대한 정보를 금방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캐시가 입양되는 과정에서 생모는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던 것이 뭔가 꺼림칙했다. 하지만 생모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에 직접 해명을 들을 순 없었다.
▲ 캐시 길크리스트(좌)와 수잔 길모어(우)
이후 생부를 찾는 데에는 몇 년이 더 걸렸다. 수잔은 족보학자답게 결국엔 그를 찾아냈지만, 왜인지 캐시에게는 생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외하고 처음엔 이름만 말해주었다. 캐시는 아마도 자신의 생부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명인일 거라고 추측했고 그녀의 생각은 적중했다.
캐시 길크리스트의 생부는 ‘윌리엄 브래드포드 비숍 주니어(William Bradford Bishop Jr., 1936~ )’라는 자였다.
연쇄살인범 생부
윌리엄 브래드포드 비숍 주니어는 1976년 3월 1일, 메릴랜드주 베세즈다(Bethesda)에서 68세의 모친 로벨리아 비숍(Lobellia Bishop), 아내 아네트(Annette Weis Bishop, 37세), 아들 윌리엄(William Bradford Bishop III, 14세), 브렌톤(Brenton G. Bishop, 10세), 조프리(Geoffrey Bishop, 5세)등 다섯 명을 살해한 혐의로 FBI의 수배 목록에 올라있는 연쇄살인범이었다.
▲ 윌리엄 브래드포드 비숍 주니어
1976년 당시 비숍은 예일대를 졸업하고 미 국무부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범행 당일인 3월 1일 오후, 그는 비서에게 몸이 좋지 않다며 조기 퇴근했다. 귀가 도중 망치를 구입하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운 비숍은 집에 있던 아내를 먼저 죽이고, 애완견을 산책시키고 돌아오던 모친을 살해했다. 이후 방에서 자고 있던 세 아들을 차례차례 죽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 살해된 가족들
차에 시신을 실은 비숍은 6시간을 달려 노스캐롤라이나 94번 고속도로 근처의 울창한 숲에 도착해 땅을 파고 시신을 넣은 다음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
다음날인 3월 2일,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산림관리원이 숲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발견했고, 출동한 현장에서 불에 탄 시체와 삽을 발견했다.
▲ 암매장 현장
이때까지만 해도 사건의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주일 후인 3월 10일에서야 이웃집에서 비숍의 가족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신고를 해왔고, 경찰이 방문해 집이 온통 피로 얼룩진 것을 보고서야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리고 숲에서 발견된 불타버린 시신의 치아와 치과기록을 대조해 희생자들이 비숍의 가족들임을 밝혀냈다.
▲ 범행현장에 모인 기자들
이후 범행 당일 비숍이 노스캐롤라이나주 잭슨빌에 있는 스포츠용품점에서 신용카드로 테니스화를 구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는 애완견을 데리고 있었으며 ‘어두운 피부’로 추정되는 여성과 함께 있었다고 증언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행적이 없어 확실치는 않다.
3월 18일에는 비숍의 자동차가 범행 현장에서 640km 떨어진 그레이트스모키산맥(Great Smoky Mountains) 국립공원의 캠프장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차에는 개사료와 피 묻은 담요가 있었으며 트렁크에는 피가 잔뜩 고여있었다.
▲ 발견된 범행차량
다음날 대배심은 비숍을 5건의 1급 살인 및 기타 혐의로 기소했다.
범행 동기
살인의 동기는 비숍이 실종되었기에 정확히 알 수 없다. 범행 당일 승진에서 누락된 것을 알게 되자 큰 좌절감에 빠진 것이 주요 원인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불안완화제인 세락스(Serax)를 처방받아 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직장동료에 따르면, 비숍은 어머니와 아내가 일과 승진에 관련해 끊임없이 잔소리를 한다며 고민을 토로해왔다고 한다. 결국 실제로 승진에 누락되자 가족들의 비난이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현재까지도 비숍은 실종 상태이다. 험준한 국립공원을 헤매다 야생동물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자살했다는 추정도 있지만 수사관들은 그가 죽었다는 것이 확실히 증명될 때까지는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범행 이후 그를 벨기에, 영국, 핀란드, 네덜란드, 독일,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등에서 목격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3월 10일 경찰이 비숍의 집을 방문하기까지 약 열흘이나 지체되었기에 그는 미국 외교여권을 이용해 어느 나라로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살인을 저지르기 훨씬 전부터 비숍은 그의 권한을 이용해 가명으로 여러 개의 비밀여권을 만들어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 FBI 수배목록
또한 비숍이 사라졌을 때 겨우 400달러만이 그의 이름으로 출금되었다. 비숍이 죽지 않았다면 다른 인물로 활동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한 이유다.
1970년대의 미국 국내선은 다른 사람을 통해 비행기표를 사면 그 표로 아무렇지 않게 여행할 수 있었기에 현대와 같이 CCTV와 위성이 깔린 시대와 달리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도주하는 것이 훨씬 용이한 상황이었다.
특히 비숍은 군사정보 훈련을 받았고 5개 국어(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세르보크로아트어)에 능통한 상태였던데다가 다양한 국가에서의 체류경험으로 해외로 도주했다면 현지 적응이 어렵지 않은 상태였다.
친아버지를 찾은 딸의 반응
캐시 길크리스트는 처음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농담이라고 생각했기에 크게 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서와 DNA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 심지어 외모도 매우 닮았기에 캐시는 결국 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 캐시와 친부 비숍
그렇다면 캐시는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비숍은 피해자였던 아내 아네트와 결혼하기 전 캐시의 생모와 만났고, 21세 무렵인 1957년에 캐시를 낳자마자 헤어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어린 피해자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배다른 형제들이었던 것이다.
생모가 입양을 보내면서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은 것은 아마 어린 미혼모였던 것이 이유로 추정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와 캐시의 삶에서 연쇄살인범의 흔적을 지운 좋은 선택이었다.
▲ 비숍의 현재 모습 추정
기대감으로 뿌리를 찾아 나선 캐시의 호기심은 악몽으로 바뀌었다. 특히 평소 부모와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던, ‘여행을 좋아하고 활달한’ 자신의 성격이 친아버지인 비숍과 일치하는 것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비숍의 모친, 즉 피해자인 친할머니는 캐시처럼 연극 관람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친부모를 찾는 일은 캐시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충격에 빠졌던 그녀는 생부모를 찾기 위한 여정을 담은 회고록 《It ‘s In My Genes》을 내놓으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예민하고 삐뚤어지기 쉬운 어린 시절에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이 그나마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며, 만약 살아있다면 86세가 되었을 친아버지를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한다. 혹시나 만난다해도 안전이 확실하게 보장된 상태에서나 시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