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 [82] 취향(翠香, 기생)
황해도 해주 근동(芹洞)에 사는 기생 취향이는 ‘그 지방에서 가무 잘하는 기생이 누구냐’할 것 같으면 손꼽아 엄지가락이로다.
나이는 몇 살인고 금년이 이구(二九)로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까무레한 눈 자태로 은근한 인정을 자아내여 어여쁜 기색이 낯에 가득하고, 온순한 천성에 재미있는 말소리로 사람을 향하여 친절히 하는 체모는 향기로운 한 폭의 난초가 아침이슬을 머금은 듯하도다.
▲ 취향(翠香)
어려서부터 음률을 공부하기에 주밀하고 착실할 뿐 아니라 성대가 청아하여 시조, 가사, 노래, 가얏고, 양금, 거문고, 검무, 승무, 입무 여러 가지가 무비명창이지만 그중에 잡가 잘하기로는 특별한 재조가 있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앵순을 반개하고 난봉가 한마디에 앵무새가 날아들고 섬섬옥수로 양금채 나직이 잡아 「싸랭- 징동징징당동」 하는 거동, 「오동추야 밝은 달에 봉황이 내려오고 수양버들 가는 히리이리리」 장단에 춤을 추니 장포밭에 금린어가 이 아닌가.
▲ 금린어(쏘가리)
부모의 성력으로 교육을 받아 이만큼 훌륭한 명기가 됨은 그 아버지 어머니된 사람은 물론이고 일반 사회계에 칭찬을 받는 바이니와, 만약 학교의 신지식을 이렇듯 배웠을 것 같으면 학교 교사로 다니기에 골몰하였을지로다.
넉넉지 못한 가세로 6,7명 가족이 취향의 일신이 고생하는 힘으로 화평하게 지내며, 늙은 부모에게 효성을 극진히 하여 화용월태 아리따운 태도, 앵화부귀 춘풍(春風)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터이더라.
【매일신보 1914.05.12】
– 엄지가락: 엄지손가락이나 엄지발가락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
– 이구(二九): 18세
– 까무레한: 엷게 까무스름한. 조금 깜은(석탄 빛깔처럼 다소 밝고 짙은. ‘감다’보다 센 느낌)
– 체모(體貌): 몸차림이나 몸가짐
– 주밀(周密): 허술한 구석이 없고 세밀한 것
– 가얏고(伽倻고): ‘가야금’을 달리 이르는 말
– 무비명창(無比名唱): 아주 뛰어나서 비길 데가 없는 명창
– 재조(才操): 무엇을 잘하는 소질과 타고난 슬기. 재주
– 앵순(櫻脣): 앵두처럼 고운 입술
– 반개(半開): 반쯤 열거나 벌림
– 거동(擧動): 몸을 움직이는 태도
– 장포밭: 창포(菖蒲)의 다른 말. 창포는 물가에서 자라므로 창포밭은 저수지나 개울가를 뜻함.
– 금린어(錦鱗魚): 쏘가리. 비늘이 비단옷 같다 하여 금린어라 불렀다.
– 성력(誠力): 정성과 힘을 아울러 이르는 말
– 일신(一身): 자기 한 몸
– 화용월태(花容月態): 꽃다운 얼굴과 달 같은 자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과 맵시를 이르는 말
– 앵화부귀(櫻花富貴): 벚꽃(櫻花)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
■ 매일신보에서는 100명의 예술인을 대상으로 기사를 연재했는데, 이 기사의 제목을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