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 [93] 화용(花蓉, 기생)
슬프다. 나이 열다섯 살에 부모 슬하를 떠나, 동기(童妓)로 광교기생조합에 몸이 나타나니, 처음 보는 것도 많고, 당치 못할 일도 당하게 된지라.
그러나 한 가지 구차(苟且)한 까닭으로 몸이 추월춘풍에 매여 일빈일소와 백만교태를 지어가며 근심 가운데 즐길 ‘락(樂)’자와 웃음 ‘소(笑)’자로 벗을 삼아 무정한 세월을 유유히 보내오기를 장근 삼년토록 하였고,
항상 온자(溫慈)한 인품을 변치 않고, 일 년 삼백육십일을 비단 위의 물결같이 평생에 생활을 삼는도다.
▲ 방화용(方花蓉)
기생으로 생활하는 바에 전후가무(前後歌舞)는 물론, 유창한 국어가 청산의 유수 같으니 보통 수작과 인사는 능히 선생을 압두(壓頭)할만하며,
때때로 그 몸의 전정(前情)을 생각하여 배우지도 않은 수심가를 어깨너머로 듣고 익혀, 달 밝은 밤 깊은 삼경(三更) 고요한 때에 홀로 베개를 의지하여 멀리 있는 부모의 생각, 자기의 헛된 생활을 생각하고 아련한 세성(細聲)으로 수심가로 자위하여 있음은 인정상 동정을 저버릴 수 없도다.
긴 한숨 쉴 적마다 향기로운 냄새는 탐화하는 봉접을 머무르게 하며, 쓸쓸한 동풍(凍風)으로 화하여(변하여) 세상만사에 뜻이 없다.
초로(草露) 같은 이 인생은 하루아침 부운으로 짝을 지어 있을 뿐이라.
그러나 조금도 사색(思索)없이 그럭저럭 잘 지내어 오는 것은 참을 ‘인(忍)’자에 몸을 던진 남부 새방골 이범구의 기생 방화용(方花蓉)인가.
【매일신보 1914.06.02】
– 동기(童妓): 아직 머리를 얹지 않은 어린 기생.
– 구차(苟且): 몹시 가난함.
– 추월춘풍(秋月春風): 가을 달과 봄바람. 흘러가는 세월을 이르는 말.
– 일빈일소(一嚬一笑):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음. 손님의 눈치를 살핌.
– 백만교태(百萬嬌態): 사람의 마음을 끌려고 부리는 갖은 아양과 태도.
– 장근 삼년(將近 三年): 거의 3년.
– 온자(溫慈): 부드럽고 인자함.
– 일 년 삼백육십일: 음력은 일 년이 약 360일이다.
– 비단 위의 물결: 흔히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식어로도 쓰이지만, 여기서는 앞에 나온 변함없는 성품을 비유하는 문구로 쓰였다. 고대 중국의 비단에 일정한 물결무늬 문양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 전후가무(前後歌舞): 기생이 배우는 모든 춤과 노래.
– 국어: 일제시대이므로 일본어를 뜻한다.
– 수작(酬酌)과 인사(人事): 일본어 회화.
– 압두(壓頭): 상대편을 누르고 첫째 자리를 차지함.
– 전정(前情): 지난날에 사귄 정. 기생되기 전의 인연을 말한다.
– 삼경(三更): 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
– 세성(細聲): 소리를 아주 가늘게 내는 판소리 창법.
– 탐화봉접(探花蜂蝶): 꽃을 찾는 벌과 나비. 기생집을 드나드는 남자 손님.
– 동풍(凍風):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
– 초로(草露): 풀잎에 맺힌 이슬. 인생의 덧없음을 뜻하는 말로 ‘조로(朝露, 아침이슬)’가 더 많이 쓰인다.
– 부운(浮雲): 뜬구름. 위의 조로와 함께 ‘부운조로(浮雲朝露)’로 쓰이며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한다. 여기서는 찾아오는 남자들이 손님으로 하루 머물다 구름처럼 떠나가는 덧없는 인연임을 말하고 있다.
– 새방골: 종로구 신문로 1가동에 있던 지명. 기생과 첩들이 많이 살았던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 매일신보에서는 100명의 예술인을 대상으로 기사를 연재했는데, 이 기사의 제목을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이라 하였다.
– 참고문헌:
• 每日申報. 藝壇一百人(九三).화용 (1914.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