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사막으로 가득한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아랍에미리트(UAE)의 두바이(Dubai)였다. 하지만 현대 두바이는 휘황찬란한 고층건물 틈에서 과거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 곳으로 변모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도시‘라는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빠르게 변모하는 두바이는 세계 공사용 크레인의 25%가 몰려있으며, 단 13%의 아랍인들만이 살고 있을 정도로 세계 각지에서 온 사업자들과 서남아시아 노동자들이 넘쳐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슈퍼카 경찰차
두바이 경찰은 기존의 람보르기니, 벤틀리 등의 경찰차 군단에 페라리를 추가했다. 이 페라리 경찰차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부르즈 할리파 앞에서 대중에게 공개되었는데, 언론은 두바이 경찰의 페라리 도입이 2008년 금융타격 이후 경기회복의 청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관련 글: 두바이의 경찰차)
특히 두바이에서 휘발유 가격은 같은 양의 생수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도로에 차량은 넘쳐나고 과속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잦아 경찰은 이를 억제하는 데 총력을 쏟고 있다. 게다가 과속 차량들은 대부분 고성능의 슈퍼카라 이들을 단속하기 위해서는 더 좋은 성능을 보유한 차량이 필수적이다.
과속사고로 악명 높은 두바이의 셰이크자이드 고속도로에서는 2012년 한 해에만 2,161명이 다치고 122명이 사망했다.
두바이의 미래는?
‘두바이 건국의 아버지’, 셰이크 라시드 빈 사이드 알 막툼(Rashid bin Saeed Al Maktoum, 1912~1990)은 과거에 두바이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의 조부는 낙타를 탔고, 나의 부친도 낙타를 탔고, 나는 벤츠를 운전하고 있고, 내 아들은 랜드로버를 운전하고 있다. 아마 내 손자도 랜드로버를 운전할 테지만… 그의 아들은 낙타를 타지 않을까?”
▲ 셰이크 라시드 빈 사이드 알 막툼(Rashid bin Saeed Al Maktoum, 1912~1990)
셰이크 라시드는 강력한 리더십의 소유자로, 1958년에 즉위하자마자 ‘두바이를 중동 제1의 항구로 만들겠다‘라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두바이의 지정학적 위치와 미래의 물류흐름을 미리 내다본 혜안이었지만 부족의 반발은 엄청났다.
수만 명의 인구에 불과한 어촌을 중동 제일의 물류항으로 만든다는 계획은 고생 모르고 자란 젊은 왕족의 망상처럼 들린 것이다. 무엇보다 아직 ‘사막의 황금‘ 석유가 발견되기도 전이었다.
▲ 과거의 두바이
하지만 국왕의 강력한 의지로 건설은 시작되었고, 1966년 석유가 발견되면서 두바이는 날개를 달고 승천했다. 1972년, 드디어 중동 최대의 항구 라시드항이 개항하며 두바이는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이루게 된다.
▲ 두바이를 상징하는 버즈 알 아랍 주메이라(Burj Al Arab Jumeirah) 호텔
셰이크 라시드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석유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자원‘이라는 판단하에 두바이가 미래에도 풍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역과 물류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프라 건설에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현재 두바이의 GDP 중 석유부문에 대한 비중은 불과 3%이다.
서두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셰이크 라시드가 말한 두바이의 미래는 ‘석유부문에 계속 의지하게 되면 결국 낙타를 타던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경고였던 셈이었다.
두바이의 똥차
최첨단 도시 두바이는 놀랍게도 2009년까지 하수도와 정화조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매일같이 수백만 명분의 인분을 도시 밖으로 싣고 나가는 ‘똥차‘가 뱀처럼 고속도로에 줄지어 있는 영상이 외국인들에게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어마어마한 인프라 건설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새롭게 건설된 지역과 건물들이 하수도 시스템과 제때 연결되지 못하면서 고물 유조차들이 정화조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 셈이었다.
특히 한여름의 찌는 더위 속에 분뇨를 싣기 위해 기다리는 것은 고역으로 대기시간만 무려 10시간에 달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트럭 운전수들은 서남아시아, 인도, 파키스탄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대기하는 시간과는 별도로 도시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분뇨처리장으로 이동하는데 1~2일이 추가로 소요되었기 때문에 사막에 몰래 오물을 투기하는 행위가 종종 발각되었다. 분뇨 투기가 적발되면 최대 10만 디르함(한화 약 2,935만 원)이 부과되고 영업주에게는 영업금지와 차량이 압수되는 중징계가 주어졌음에도 이 같은 행위는 계속되었고, 사막의 오염과 페르시아 만으로의 오수 유입은 관광객들에게 장티푸스와 A형간염의 공포를 안겨주기도 하였다.
다행히 하수도 시스템이 꾸준히 확충되고 보완되면서 이러한 이야기들은 완전히 과거의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금융위기와 모래폭풍
아래의 사진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 화제가 된 모습이다. 수많은 외국인 사업가들이 호황기에 할부로 슈퍼카를 구입하고 불황이 닥치자 ‘주체할 수 없는 채무‘를 갚기를 포기하고 공항으로 달려가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차량은 버려둔 채 국외로 탈출한 것이었다.
두바이에서는 빚이 생기면 파산신청은 불가하며 여권을 압수당한 채로 돈을 갚아나가거나 그게 싫으면 감방 신세를 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한 포르쉐 차량에는 차 키가 꽂힌 채로 조수석에는 두바이 은행에서 발행한 144,000디르함(한화 약 4,226만 원)의 대출서류가 함께 버려져 있기도 했다.
두바이 교통국은 먼지를 뒤집어쓴 차량의 앞 유리에 단속 딱지를 붙인 후 15일이 지나도 차량이 사라지지 않으면 곧바로 견인해간다. 이 차량들은 보통 4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중고차 브로커들의 지갑을 부풀려주었다.
▲ 중고차 매입 광고
하지만, 웃음거리가 된 사진 속의 차량들 중에는 중동에서는 일상적인 모래폭풍으로 인해 먼지를 뒤집어쓴 차량도 많았는데, 이런 차량들까지 모두 두바이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함께 퍼져나갔다.
▲ 영화 ‘미션 임파서블 4’의 사우디 모래폭풍 장면
호황기에는 선망의 대상으로 찬사를 받았던 도시가 추락의 기미를 보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사람들의 비웃음이 이어진 것이다.
라마단도 길어지는 두바이의 고층
라마단은 이슬람에서 행하는 약 한 달간의 금식기간으로 일출에서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음식과 물을 먹지 않는다.
현대화된 초고층건물이 즐비한 두바이에서 라마단은 조금 독특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의 80층 이상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지상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태양을 더 오랫동안 볼 수 있기 때문에‘ 라마단 금식을 2분 더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두바이의 최고 성직자 모하메드 알 쿠바이시(Mohammed al-Qubaisi)는 ‘부르즈 할리파의 80층 이상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2분을 더 기다려야 하고, 150층 이상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3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정확한 시간까지 제시했다. (부르즈 할리파의 거주공간은 총 160층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엄격한 규율은 비행기로 여행하는 사람이나 산악지방이나 고지대에 사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부르즈 할리파
미국의 근대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구겐하임 미술관, 카우프만 저택 등을 남긴 거장이다. 1956년, 그는 시카고에 528층 규모(1,730m)의 ‘더 일리노이즈(The Illinois)’를 건설하고 싶어 했지만 염원을 이루지 못했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
하지만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르즈 할리파의 높이는 829.8m로 ‘더 일리노이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삼각형 형태의 모양이나 첨탑의 생김새는 전체적으로 많이 닮아있다.
▲ 부르즈 할리파와 더 일리노이즈
해적의 후예
18세기 초, 라스 알카이마 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카와심(Qawasim)부족, 내륙의 리와(Liwa) 오아시스를 근거지로 하는 바니야스(Bani Yas)부족, 오만 지역의 알부사이드(Al-Busaid)부족이 걸프 지역의 3대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 중 카와심과 알부사이드 부족간에 세력다툼이 이어졌고, 영국은 알부사이드를 지원한다. 카와심은 이를 ‘적과의 동맹’으로 규정, 영국과 전쟁을 선포하고 닥치는 대로 영국 선박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이들의 공격을 해적행위로 규정하고, 카와심의 근거지인 라스 알카이마 지역을 ‘해적 해안(Pirate coast)’ 으로 명명하였다.
▲ 해적 해안(Pirate coast) 위치
1820년, 영국 함대는 카와심 부족의 배를 모두 격침시키고 라스알카이마 항을 장악하였다. 1853년에 영국은 이들과 ‘항구적인 해상휴전조약(Treaty of Peace in Perpetuity)’을 맺고 식민지로 삼은 뒤 해적 해안의 명칭을 ‘휴전 해안(Trucial Coast)’ 으로 바꾸었다. UAE의 옛 지명인 ‘Pirate coast‘는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기원한 것이다.
▲ 소말리아의 해적들은 UAE의 100년 전 모습이다.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인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 국민들은 이들 부족의 후예들이다.
▲ 중동의 부자들
조상들은 ‘해적’이라 불리며 낡은 보트를 타고 약탈을 일삼았지만, 한 세기 만에 후손들은 석유 덕분에 막대한 자금을 퍼부어 세계의 유명한 기업과 스포츠팀을 구매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부리는 것을 보면 사람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처럼 국가의 운명 역시 예측하기 힘든 미래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