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갑술년 홍수가 휩쓴 경북 안동의 모습
1934년 7월 중순, 오랜 가뭄으로 대용작물까지 준비하던 한반도 남부지방 일대에 7월 17일 오전 6시부터 폭우가 쏟아지면서 갑술년(甲戌年) 홍수가 발생했다. (관련 글: 갑술년 대홍수 피해)
특히 경상북도 안동(安東)은 일대 전체가 침수되었고, 고려시대에 지어진 영호루(映湖樓)가 유실되는 등 인명과 재산상의 큰 피해를 입었다. 아래는 당시 갑술년 홍수가 휩쓴 안동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 안동 대석동, 안흥동 민가들이 물에 잠긴 모습. 1934년 7월 23일 오후 3시, 낙동강이 범람하면서 안동은 전멸상태에 빠졌지만 교통이 두절되면서 구호의 손길이 닿지 못하였다.
▲ 처참하게 파괴된 안동읍
▲ 1934년 7월 23일, 안동역 쪽에서 바라본 파괴된 가옥들
▲ 폐허가 된 안동역 건물
▲ 물에 잠긴 법룡사(法龍寺) 일대와 끊겨있는 철로. 안동은 군청, 우편소, 경찰서, 학교, 금융조합 등 중요한 건물이 즐비한 서부동, 동부동, 옥동, 안기동 일대가 침수되어 지붕만 보이는 상태였다. 이재민 1만 3천 명은 부근의 높은 산으로 올라가 피신한 상태였다.
▲ 파괴된 가옥과 쓰러진 전신주. 안동 주민들은 고립과 함께 발전소가 침수되어 암흑천지 속에서 고통을 겪었다. 7월 29일에는 긴급하게 전화가 개통되었으나 완전한 복구에는 1개월 반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 영호루(映湖樓)가 떠내려가고 주춧돌만 남은 모습. 사진을 촬영한 ‘1934.7.23’이라는 날짜가 적혀있고, 우측 상단에는 유실 전 영호루의 모습이 합성되어 있다.
▲ 유실된 영호루 주변. 1934년 7월 24일 오후 2시, 영호루에서 복구공사를 하던 인부 100명 중 84명이 탁류에 떠내려갔다. 또 영호루 아래에 있는 초가 건물에 대피해있던 피난민 40명도 물에 휩쓸렸으며 이중 단 한 사람만 풍산면에서 가까스로 구조되었다.
▲ 갑술년 홍수가 발생하기 전 영호루의 모습. 1970년에 복원된 현재의 영호루는 시멘트로 만들어졌다.
▲ 수해피해로 낙동강 제방이 붕괴되어 일대가 초토화된 모습.
▲ 조선일보 소속 비행사 신용욱(愼鏞頊, 1901~1961). 그는 접근이 어려운 피해현장을 상공에서 촬영하기 위해 동료 후지타 다케아키(藤田武明)와 남부지방으로 향했다.
▲ 프랑스제 삼송 2(Salmson 2A.2)를 경비행기를 타고 한반도 남부지방을 취재하러 떠나는 신용욱(愼鏞頊).
취재 이틀째인 7월 27일 오전 10시에 대구 헌병대 연병장에서 이륙하여 10시 40분에 안동 상공에 도착한 그에 따르면, 안동은 완전히 침수되어 기차역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고 부근의 군청과 우편국도 모두 붕괴되어 번화가도 사라진 상태였다.
▲ 신용욱 일행이 상공에서 촬영한 안동인도교 일대.
1934년 7월 24일 아침, 이곳에서 교량 가설공사를 하던 인부 150명이 물에 휩쓸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들은 강 한가운데에 있는 삼각주 백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물이 불어나자 강 건너편을 보고 구조요청을 하였지만, 구조대가 건너갈 준비를 하던 차에 제방이 터지면서 전원 행방불명되었다.
▲ 상공에서 본 안동역 일대. 사진은 신용욱과 동승한 후지타 다케아키(藤田武明)가 촬영하였다.
▲ 물이 빠진 안동인도교 사고 현장
▲ 경성 중앙YMCA회관에서 열린 수재 피해 상영회. 당시 삼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이재민이 30만에 달하자 조선일보 특파원은 구호를 위해 현장의 실상을 카메라에 담아 경성 시내 곳곳에서 상영회를 가졌다.
제1 회장인 중앙YMCA회관은 1500명, 제2 회장인 교동공보(校洞公普)와 제3 회장인 어의동공보(於義洞公普)의 교정에는 각 8000명, 제4 회장인 사직공원(社稷公園)에는 1만 명의 인파가 몰렸으며 밤 9시 20분부터 시작된 상영회는 11시 30분경에 종료되었다.
▲ 조선일보사에서 수해현장으로 보내는 구호품
▲ 매일신보(每日申報)도 수재현장의 사진을 경성시내 7개소에서 무료 상영하였다. 사진은 왼쪽부터 수송보통학교, 어의동보통학교 교정과 조선극장이다.
▲ 1934년 7월 25일, 매일신보사에서 수해현장의 아동들에게 보낼 옷가지를 포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