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경성의 고무신 가게와 장신구 상인들
1920년대, 경성의 거리에서 댕기와 머리띠를 들고 판매하는 상인들의 모습. 왼쪽의 상점 앞 매대에 ‘호모화(護謨靴)’라고도 불렸던 고무신이 가득 쌓여있다.
1919년, 인천항을 통해 조선에 수입되기 시작한 고무신은 해마다 급증하여 1923년에는 인천항으로만 85만 켤레(가격 약 60만 원)에 달하는 고무신이 수입되었는데, 이는 부산항 등 기타 항구를 제외한 수치였다.
고무신은 비가 와도 외출이 가능하였고, 한 켤레를 사면 오래 신는 가성비로 인해 조선인들 대부분이 애용하였다. 이로 인해 기존의 미투리와 짚신 등 전통신발의 수요가 급격하게 줄어들자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은 농촌에서는 ‘고무신 불매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등장 초기에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고무신은 점차 국내에서도 생산하기 시작했으나, 전쟁으로 원료 수급이 불안한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점점 귀한 물건이 되어갔다. 고무공장에서는 값싼 재생고무에 생고무를 혼합하는 방식으로 저품질의 고무신을 생산하여 단속을 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