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사고 후 집으로 돌아온 타이타닉 생존자들의 모습
1912년 4월 15일, 세계 선박 침몰사고 사상 가장 큰 피해중 하나로 손꼽히는 타이타닉호의 침몰.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숨겨진 이야기와 영웅담이 알려지며 탑승자들은 생존자와 희생자를 막론하고 모두 비극의 주인공으로 여겨지지만 사고 당시만 해도 생존자들은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고통스러워했다. 특히 성인 남자의 생존율은 20%에 불과했기에 기사도 정신이 주를 이루었던 당시의 관념으로 인해 생존한 남성들은 오해를 받고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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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이 살아 돌아온 덕분에 최후까지 영웅적이었던 악단, 숭고한 사랑을 보여준 부부, 구조받지 못한 반려견 등 모든 이야기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졌다. 또한 수많은 빙산을 피해 가며 차가운 해상에 떠있던 생존자들을 구조한 카파시아호(RMS Carpathia)의 노력도 헛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 카파시아호로 접근하는 타이타닉호의 구명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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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파시아호에 탑승한 타이타닉 생존자들. 카파시아호의 승객들은 이들에게 담요와 옷을 아끼지 않고 내주었다.
사고 발생 3일이 지난 4월 18일, 뉴욕 허드슨 리버 파크(Hudson River Park)의 54번 부두에 생존자들을 태운 카파시아호가 들어오자 그제야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정도로 전해지던 재난의 실체와 실제 인명피해의 수치가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또한 규모에 비해 적었던 구명보트의 개수, 빙산이 있는 해역에서의 최고속도 운항,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은 선주 브루스 이스메이(J. Bruce Ismay, 1862~1937)등에 대한 충격과 분노가 이어지며 단순히 운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인재’라는 사실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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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죄책감으로 무기력하던 생존자들도 ‘앞으로 여객선 안전운항을 준수하기 위한 여론을 환기시키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해양안전법 개정을 촉구하는 움직임을 가지며 희생자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아래는 당시 미국과 영국으로 돌아왔던 타이타닉 생존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 뉴욕 허드슨 리버 파크(Hudson River Park)의 54번 부두(Pier 54)의 군중들.
▲ 54번 부두에서 4만여 명의 군중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카파시아호를 기다리고 있다.
▲ 영국 사우샘프턴의 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 타이타닉 소유업체)의 사무실 밖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무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성들은 숨진 승무원들의 아내이거나 가족 중의 한 명이었다.
▲ 타이타닉호의 무선통신사 해롤드 토머스 코핀(Harold Thomas Coffin)이 뉴욕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Waldorf Astoria Hotel)에서 사고조사를 위한 상원위원회의 심문에 답하고 있다.
1897년 개장한 이 호텔은 당시 세계 최고의 부호 존 제이콥 애스터 4세(John Jacob Astor IV)의 소유로, 그는 신혼여행 중 타이타닉호에 탑승했다가 아내만 구명정에 태웠고 이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타이타닉호의 무선실에서 해롤드가 주고받은 신호기록표는 1992년, 경매에 나와 6만 6천 파운드(한화 약 1억 850만 원)에 낙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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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 승무원들의 모습.
아랫줄 왼쪽부터 어니스트 아처(Ernest Archer), 프레더릭 플리트(Frederick Fleet), 월터 퍼키스(Walter Perkis), 조지 시몬스(George Symons), 프레더릭 클렌치(Frederick Clench).
두 번째 줄은 아서 브라이트(Arthur Bright), 조지 호그(George Hogg), 존 무어(John Moore), 프랭크 오스만(Frank Osman), 헨리 에치스(Henry Etches).
▲ 생존 승무원 프레더릭 플리트(Frederick Fleet, 1887~1965)는 망루에서 빙산을 처음 발견한 승무원으로 귀환 후 제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모두 참여해 살아남았다.
그는 사고조사에서 “만약 실수로 가져가지 않은 쌍안경이 있었더라면 빙산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단호하게 증언하기도 하였다. 큰 사고와 두 번의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프레더릭은 말년에 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1965년 1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영국선원노조(National Union of Seamen)의 사무실에서 생존 승무원들에게 난파선 사고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 영국 플리머스 데번포트(Devonport)의 군중들이 귀환한 생존자를 둘러싸고 사고 당시의 무용담을 듣고 있다.
▲ 한 여성의 사인 요청을 받은 타이타닉 생존자가 흔쾌히 사인을 해주는 모습.
▲ 영국 사우샘프턴(Southampton)역에 도착하는 타이타닉호의 생존자들을 가족과 지인들이 승강장에서 기다리고 있다.
▲ 사우샘프턴에서 귀환하는 생존자들을 마중 나온 가족과 지인들.
▲ 가족들의 환영을 받는 생존자들. 사우샘프턴은 699명이 탑승해 549명이 사망한 지역으로 그 어느 곳보다 슬픔이 컸다.
▲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아내와 키스를 나누는 타이타닉 생존자.
▲ 아일랜드 코브(Cobh)에 있던 화이트 스타 라인의 매표소 모습. 북아일랜드 벨파스트(Belfast)에서 건조된 타이타닉은 이곳에서 탑승한 123명의 승객을 마지막으로 태우고 미국으로 향하다가 대서양에서 침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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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이 탄생한 도시 벨파스트의 충격도 매우 커서 주말 교회예배는 사람들로 꽉 찼으며, 할랜드 앤드 울프(Harland & Wolff) 조선소의 근로자들은 거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불침선’이라 불렸던 타이타닉은 벨파스트의 자랑이자 영국 조선기술의 상징이었던 만큼 이들은 사고에 대해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며 슬픔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