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진의 뒷이야기 ③ ‘크리스마스의 기적’ 메러디스 빅토리호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는 1950년 연말의 흥남철수작전은 오늘날 전쟁 속에서 자유와 인권을 지켜낸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6개월 후인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패배한 유엔군은 매서운 추위 속에서 유일한 탈출로인 해상으로의 탈출 작전을 시작한다.
▲ 영화 ‘국제시장(2014)’의 흥남철수 장면
미군의 철수 소식이 들리자 흥남시내에는 공포가 번져나갔다. 흥남의 거리와 항구에는 손을 놓친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헌병들이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연신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가 귀를 울렸다.
철수하는 배에 실을 수 없는 물자와 차량을 불태우면서 일대는 불길과 연기가 피어올랐고, 중공군이 흥남부두로 진격을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엔군의 함정에서 발사한 함포의 포탄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잘못 사용되고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사진
철수작전에 투입된 전함과 화물선·상선만 200여 척. 총 피난민 10만여 명 중 가장 많은 14,000명의 인원을 수송한 배가 화물선으로 활약하고 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이다.
그런 이유로 흥남철수작전에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만 투입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 흥남 해변의 피난민들
위와 같이 흥남 해변에 피난민들이 줄을 서서 배에 타고 있는 사진에는 어김없이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탑승하는 피난민들’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흥남철수와 관련된 사진 속에서 해변에 상륙한 채로 게이트가 열려있는 배들은 모두 ‘Landing Ship Tank(LST)’, 즉 전차상륙함이다.
▲ 비슷한 형태의 성인봉함(LST-685)
수많은 사람들이 탈출을 위해 줄을 선 모습이 참혹한 전쟁의 모습을 강렬하게 보여주기 때문인지 피난민들이 탑승하는 장면의 배는 모두 메러디스 빅토리호로 설명되는 상황이 허다한데, ‘기적의 배’로 불리는 상징성을 갖고 있는 만큼 혼동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 1950년 12월 19일, 흥남의 피난민들
위의 사진 같은 경우는 게이트도 열려있고 측면에 ‘845’라는 식별번호도 적혀있음에도 메러디스 빅토리호로 표기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실은 상륙함 ‘USS Jefferson County'(LST-845)에 탑승을 대기하고 있는 피난민들의 모습이다.
▲ LST함의 갑판에 가득한 피난민들
위 사진도 메러디스 빅토리호로 많이 설명되는 사진인데, 역시나 게이트가 열려있고 부두가 아닌 해변에 상륙해있는 것으로 보아 LST함이다.
▲ YTN의 엉터리 일러스트
YTN에서는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일러스트에서 게이트가 열려있는 LST함의 측면에 ‘MEREDITH VICTORY’라고 임의로 써넣으며 완전히 다른 선박을 메러디스 빅토리호로 칭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확한 모습은 아래와 같다.
▲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
선수(船首)에는 닻이 있고 게이트 같은 것은 전혀 없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해안가에 가까이 접근했다가는 좌초되기 딱 좋은 수송선이다.
혹시 선미(船尾)에 게이트가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이 배는 2차 대전 당시 대량 생산된 수송선으로 지금도 똑같은 모양의 배가 박물관으로 운용되며 남아있기 때문에 쉽게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 아메리칸 빅토리호의 선미.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쌍둥이 선박이다.
남아있는 쌍둥이함의 구조를 확인해보면 위와 같이 선미에도 방향키만 달려있을 뿐 게이트는 없다.
▲ 아메리칸 빅토리호가 부두에 정박해 있는 모습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함흥 해변에 상륙한 LST함과는 달리 위와 같이 부두에 접안하여 물자와 피난민들을 실었다.
▲ LST함에 탑승하는 피난민들과 멀리 보이는 수송선
위의 LST함에 탑승하는 피난민들의 뒤쪽 멀리에 흥남부두에 접안한 수송선의 모습이 보인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도 저곳에서 피난민들을 탑승시켰을 것이고, 긴박한 상황에서는 배의 측면으로 줄사다리를 내려 어선으로 접근해온 사람들을 태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 모습은 영화 ‘국제시장(2014)’과 거제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철수작전 기념비에 잘 고증되어 있다.
▲ 영화 ‘국제시장'(좌) / 흥남철수작전 기념비(우)
민간인을 마지막으로 태운 배는 ‘온양호’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관련된 사실들 중 또 하나 잘못 알려진 것이 있는데 ‘민간인을 마지막으로 태운 배’라는 것이다.
▲ ‘마지막 배’는 틀린 이야기
아무리 긴박한 상황이라 해도 중공군이 접근하고 있는 위험지역에 민간인들이 대부분인 수송선을 부두에 마지막까지 남겨둘 리가 없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작전에 참여한 ‘수송선들 중 마지막’으로 흥남을 떠났을 뿐 마지막 배는 아니었다.
민간인을 실은 마지막 배는 LST함인 ‘온양호’였다. 온양호를 마지막으로 철수작전이 끝나며 흥남부두는 유엔군의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한국에서 활약한 빅토리함들
가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짧게 줄여서 ‘빅토리호’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
위에 말했듯이 ‘빅토리함(Victory ship)’은 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장에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비상조선계획(Emergency Shipbuilding Program)’에 따라 총 531척이 양산되었기 때문. 이 함선들은 2차 대전이 끝나고 퇴역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전장에 투입되어 물자를 전투지역으로 수송하며 활약했다.
이중 레인 빅토리호(SS Lane Victory)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함께 흥남에 투입되어 민간인 7,010명을 탈출시켰고 하선할 때는 7,011명이 내렸다. 항해 중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즉 ‘빅토리호’라는 호칭은 다른 빅토리호들도 전장에 있었음을 간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박물관으로 사용중인 ‘레인 빅토리호’
공산주의 소련과 맞서 싸운 ‘소련 빅토리호’
당시 생산된 531척의 배들 중 34척은 동맹국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218척은 미국 도시들의 이름, 150척은 교육기관들의 이름을 붙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여자대학인 메러디스 컬리지(Meredith College)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렇다면 2차 대전 당시에는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소련의 이름을 딴 빅토리호도 있었을까.
▲ 소련 빅토리호
당연히 있었다. ‘소련 빅토리호(SS USSR Victory)’는 빅토리함들 중 세 번째로 건조된 함선이었으며, 6.25 전쟁에도 참전했다. 1950년 11월 18일부터 1952년 12월 23일까지 추가 파병되는 미군을 본토에서 실어오거나 우편물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등 ‘소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공산국가들의 침략에 맞서 싸운 것이다.
1944년 당시 LA 윌밍턴에서 열린 소련 빅토리호의 진수식에서는 미국 주재 소련 부영사의 부인이 샴페인을 깨뜨렸다. 또 소련 부영사는 축하연설에서 “이 배는 연쇄 타격을 위한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될 것이며 우리의 적을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불과 6년 후 본인들이 그 ‘적’이 될 운명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