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진의 뒷이야기 ⑧ 목숨을 건 중세의 종치기

종소리로 폭풍우를 몰아내자!


과거 한국의 미신을 보고 있자면 황당한 사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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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연현상이나 질병, 우연을 원시적인 주술로 해결하려는 것은 비과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거 유럽에도 이와 같은 사례가 있었다.

1700년대까지만 해도 폭풍우가 동반하는 천둥과 번개는 나무와 집을 파괴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고층건물이 별로 없던 시대에 번개는 금속의 종이 달린 교회탑을 직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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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탑에 내려치는 번개


중세시대로부터 번개는 ‘악령이 정체를 드러내거나 신이 형벌을 내리는 것‘이라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이를 성직자들은 종을 울리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모든 사람이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시절, 중세의 하루일과와 행사는 교회의 종소리가 결정했다.

아침의 종은 중세 유럽인들을 어두운 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준 신에게 올리는 감사의 인사였고, 종과 함께 시작되는 일출은 예수의 부활을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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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교회의 종탑


어둠 속에서 폭풍우가 마을을 휩쓸고 번개가 치는 상황이 닥치면 성직자나 종지기(Bell-ringer)는 종탑으로 올라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물에 젖은 밧줄을 당겨야 했다. 지금이라면 등골이 오싹한 장면이다.

운이 나쁘게도 감전으로 사망한 성직자들의 비석에는 ‘그는 번개에 깃든 악령을 몰아내다..‘ 따위의 문구가 새겨졌다.

 

심지어 당대의 지성인들조차 ‘악령과의 전투를 통해 번개를 몰아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종의 음향이 번개를 약화시키는 에너지를 생성할 것’이라는 얼핏 과학적으로 보이는 예측을 한 것이 일반인들과의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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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현대인이라면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종을 울리는 행동은 사망률만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이 눈에 띄는 사망률이 계속 유지되고 16세기가 되어서야 ‘종을 울리는 것은 안전하기보다 오히려 위험하다‘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이런 지식인들의 발표가 있고서야 종을 울리는 행동은 줄어들었다. 왜 그 이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번개 속에서 종을 울려대는 행위가 묵인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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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젖은 줄을 통해 번개를 맞는 모습


이 미신을 창조해낸 사람들은 사람이 죽고나서도 ‘종을 너무 늦게 울렸다‘라거나 ‘종을 제대로 치지 않아 소리가 탁했다‘며 합리화했고, ‘만약 종을 치지 않았다면 한 명의 목숨이 아닌 교회 전체가 파괴되었을 것‘이라며 그럴듯한 주장을 한 것이다.

 

1749년, 피뢰침을 발명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성직자들의 반대부터 돌파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이 번개의 형태로 나타나는 악령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를 통해 피뢰침을 보내셨다”라는 말로 발명의 공을 신에게 돌리며 자신의 발명품을 사용하도록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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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저민 프랭클린이 만든 피뢰침


이후 프랑스는 1768년부터 폭풍우가 치는 동안 교회탑에 올라가는 것을 금지하기 시작했고, 1787년에는 프랑스 전역으로 금지령이 확대되었다.

 

피뢰침의 발명 이후에도 완고한 성직자들은 한동안 이 관행을 한동안 이어가면서 1753년부터 1786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103명, 1750년에서 1783년 사이 독일에서는 121명의 종지기가 번개에 맞아 감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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