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경성(서울)의 밤거리 풍경
1929년,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 경성(서울)의 밤거리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신문에서 다룬 경성 밤거리의 일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 시절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 딱딱이 치는 사람(야경꾼)
남들 다자는 밤중에 부잣집 문을 지켜 주느라고 밤잠 못 자고 거리에서 거리로 돌아다니는 야경꾼의 딱딱이 치는 소리. 겨울밤에 여러 가지 감상 많은 사람의 귀를 울린다.
묻노라! 밤을 새워가며 지켜주는 시민은 어떤 처지에 있으며 몇 푼 되지 않는 돈에 목을 매고 밤을 새우며 딱딱이 치고 다니는데 처치는 어떤 처지에 있느냐?
그들은 대개 고학생(苦學生)들이다! 신이여! 몸이 얼고 발이 시린 그에게 따뜻한 손을 베푸소서.
▲ 순찰도는 야경꾼
■ 야경꾼(夜警員)은 야간에 화재나 범죄가 없도록 순찰하는 사람으로 ‘딱딱이’라 부르는 박달나무 조각을 두드리며 범죄자들에게 미리 경고를 했다. 일제시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야경꾼 제도는 시행되었으나 1960년대 후반부터는 서서히 사라졌다.
2. 은행 앞 걸식하는 아이
경경(京境. 경성 안)에는 만호천문(萬戶千門)에 따뜻한 방이 많지만 어린아이를 재울만한 곳이 없어 큼직한 돌집 앞에는 추운 날 꿈도 편안치 못한 어린 걸인이 무수하다.
가련한 걸인아. 네가 누운 그 집 대문간만 들어가면 돈은 산같이 쌓였다만 너에게는 한 푼이 없구나!
▲ 거리의 어린 노숙자들
■ 일제시대인 1920년대에도 고아원 등의 아동보호시설은 있었으나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미흡했을 것이다. 지금은 은행 같은 건물이 있는 대로에 어린아이들이 노숙하는 광경은 쉽게 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3. 웃음 파는 색주가(色酒家)
경성의 어두운 거리에는 여러 가지 귀신이 유행한다.
노름꾼, 밀매음은 물론 공연하게 매음하는 공창이 있는 한편, 공연한 밀매음이 있으니 그것은 색주가들이다. 적으면 2~3원, 많으면 10여 원에 정조를 판다. 그리고 값싼 도덕군자는 너희들을 마녀와 같고 귀신과 같다한다.
그러나 네가 그렇게 되는 원인이 어디 있는 것을 안다면 지옥에 들어갈 사람은 너보다도 유지 신사가 먼저 들어갈 것이다.
▲ 내외주점 앞의 여성들
■ 색주가(色酒家)는 젊은 여성을 두고 술과 몸을 파는 곳이었다.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현대의 유흥가 풍경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위 사진 속에는 내외주점(內外酒店)이라고 적혀있는데, 이곳은 여자가 술시중을 드는 색주가와는 달리 여염집 아낙네나 과수댁이 술자리에 동반하지 않고 술상만 차려놓고 나가는 곳이었다. 말 그대로 ‘남녀가 서로 피하는(內外)‘는 건전(?)한 주점이었다.
4. 야끼이모
겨울 거리에 눈보라는 치는데 반짝반짝하는 빨간 불을 쬐며 고구마 굽는 장수는 지나가는 남녀 학생의 주머니 털이로 5전, 10전을 모으고 이것을 팔아서 어린 자식과 한 끼라도 더 먹으려고 언 손을 빨간 불에 쬐며 자동차, 인력거 타고 지나가는 부자를 노려본다.
그 가슴은 무엇을 생각하고, 그 눈에는 무슨 빛이 떠올랐는고?
▲ 군고구마 행상
■ 야끼이모(やきいも)는 ‘군고구마‘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도 한겨울 거리에서 볼 수 있지만 일제시대에는 골목마다 돌아다니며 “야끼이모~! 야끼이모~!”를 외치는 군고구마 장수의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1931년 2월, 경성의 군고구마 장수는 250명이었으며 하루 평균 1원 60전의 수입을 올렸다. 햇고구마 철이 되면 군고구마 장수의 숫자도 늘어났으며, 이와 비례해 경성부민들의 군고구마 소비량도 함께 늘어났다.
5. 인력거군(人力車軍)
어떠한 사람이 와서 찾던지 너는 돈만 주면 사람을 태운다. 부자도 태우고 월급쟁이도, 밤이면 기생도 태우고…
추운 날 땀을 흘리며 사람을 끌고 가는 너의 가슴에는 술국과 따뜻한 방이 얼마나 그리우랴?
▲ 인력거꾼
■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인력거도 일제시대 경성의 주요한 밤거리 풍경 중 하나였다.
소설가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1924년작 「운수 좋은 날」의 인력거꾼 김첨지가 활동하던 시기는 이미 인력거의 운송수단으로써의 가치가 점점 떨어져 가던 시기였다. 1921년 2,642대에 달하던 경성의 인력거는 1925년 2,035대로 급감했다.
하지만 이는 바닥이 아니었다.
1930년 경성부 세무과 통계에 따르면 등록된 인력거는 1,092대로 5년 만에 반토막이 났으며 1932년에는 132대, 1938년에는 30대로 점점 멸종되어가는 운송수단이었다. 반면 자전거는 1932년 17,813대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사라져 가던 인력거는 전쟁으로 연료난이 심화되자 잠깐이나마 폭발적으로 늘어나 1939년 경성에서만 400대가 영업하였다. 이때는 ‘돈 잘 버는 인력거’라는 소문이 나서 인력거 감찰 패(현재의 운전면허)가 100원에 거래되기도 하였으며 인력거 한대의 하루 수입이 최고 10원에 달하기도 하였다.
▲ 1945년, 서울 남대문로 2가에서 미군이 인력거를 타고 관광을 하고 있다. 【사진: 광복 30년, 시련과 영광의 민족사 / 이경모】
해방 이후에도 인력거는 영업을 하였으나 주로 낮에는 쉬다가 야간에 고객을 은밀히 홍등가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며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았다.
신분제가 없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사람이 사람을 태우고 끌 수 없다’며 인력거는 여러 사회단체로부터 철폐 압력을 받기도 하였으나 자동차가 급증하면서 자연스럽게 거리의 풍경에서 지워져 갔다.
참고문헌:
• 조선일보. 경성의 밤 一. 딱딱이치는사람. (1929.01.16)
• 조선일보. 경성의 밤 二. 銀行압헤乞兒. (1929.01.17)
• 조선일보. 경성의 밤 三. 우슴파는色酒家. (1929.01.18)
• 조선일보. 경성의 밤 四. 야끼이모. (1929.01.19)
• 조선일보. 경성의 밤 五. 人力車軍. (1929.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