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전의 모습과 현재 비교

1986년, 우크라이나 북부의 계획도시 프리피야티(Pripyat)에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난지도 30여 년이 넘게 흘렀다.

원자력 역사상 최악으로 평가되는 사고의 충격과 복구과정의 드라마틱한 요소는 관련 영화와 미국 HBO의 시리즈물 ‘체르노빌(Chernobyl)’로 제작되며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온라인을 통해 사고 이전 프리피야티의 사진들을 보면 흑백이나 저화질 사진 속에서도 사람들의 행복이 전해져 온다. 반면 현재의 프리피야티는 텅 빈 회색의 얼어붙은 도시가 된 모습이다.

 

프리피야티 도시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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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원자력 발전소 건설계획이 처음으로 대두되었고, 1970년 2월 초에 이 계획은 현실화된다.
발전소를 운영할 직원들을 위한 계획도시가 그에 앞서 탄생했다.

 

건설업자들과 경영진이 허허벌판으로 들어오면서 이들이 먹고 살 숙소와 사무실이 세워졌고, 직원들은 고임금이 보장된 살기 좋은 계획도시로 가족들을 데려왔다. 물론 이곳에서 새로운 가족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체르노빌 원전이 ‘프리피야티 원전’으로 불리지 않은 이유는 이처럼 발전소 건설이 시작될 당시 프리피야티는 지도에도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소련 정부는 공사가 시작되는 곳의 역 이름을 원전에 붙였고, 새로운 정착지의 이름은 1972년 설문조사를 통해 도시 근처에 흐르는 프리피야티 강의 이름을 따서 같은 해 4월 24일 공식화되었다.

 

프리피야티 커뮤니케이션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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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에는 첫 콘크리트를 붓는 행사와 함께 5년간의 발전소 건설이 지속되었고 도시는 더욱 커져갔다.

 

아이들도 많이 태어나면서 상점과 학교, 놀이공원이 들어섰고 1975년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프리피야티에는 발전소에서 일하기 위한 30개 이상의 국적 49,000명이 모여 있었다. (피난 전 마지막 인구조사에서는 인구 47,500명 국적은 27개국이었다.)

 

당시의 커뮤니케이션 센터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보이지만 뒤편 벽의 우주비행사 그림으로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

 

프리피야티 라자레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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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의 프리피야티 라자레프(Lazarev Street) 거리의 깨끗하게 정비된 도로에서 마라톤 행사가 열리는 모습. 이 시기에 드디어 도시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에 따라 소련의 오래된 관습인 큰 도시마다 하나씩 있는 문화궁전도 들어섰고 1988년에는 무역센터와 스포츠센터 등도 들어설 예정이었다.

 

현재는 화단으로 추정되는 곳에 나무가 우거지고 있고 도로는 여기저기 파여있는 버려진 모습이다.

 

사라진 거리와 횡단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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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대로변의 흔적과 도로 사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이다. 오른쪽의 가려진 건물과 전봇대의 모습으로 같은 위치임을 알고 보면 희미한 횡단보도와 화단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체르노빌(Chernobyl)’은 러시아의 풀에서 기원한 이름으로 지역의 들판에는 이 풀이 널리 자생하고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 자연이 이곳을 덮어버릴 운명을 예고한 이름인듯하다.

 

프리피야티 여객선 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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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터미널의 과거와 현재 모습.

 

프리피야티는 기차, 버스, 자동차, 여객선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도착할 수 있는 접근성을 갖춘 도시였다. 1976년부터 강을 통한 수송이 개발되었으며, 소련당국은 커진 도시를 위해 수로를 확장하였고 총연장은 590km 이상에 달했다.

 

가라앉는 여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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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정기적으로 실어 나르던 여객선은 94km 떨어져 있는 키예프 항로를 정기적으로 운행했다.

 

가라앉는 여객선처럼 도시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건설이 시작된 지 16년, 이름이 탄생한 지 14년, 발전소 가동이 시작된 지 11년, 도시의 지위를 획득한 지 7년 만이었다.

 

거리의 물 자동판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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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하면 ‘탄산수 자동판매기’이다.
1950년대 후반, 소련에서는 거리에 자동판매기를 통한 상품 판매가 빠르게 발전했다. 수도 모스크바에만 탄산수 자판기가 약 1만 대 설치되었으며, 거리는 물론 공공장소 어디에서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사진 속의 기계는 AT-101SK(ат-101ск)모델로 1980년대에 주로 설치되었다. 이를 통해 사진 역시 80년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계는 12°C 이하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수냉 장치가 있었으며, 단맛의 시럽을 추가할 수 있었다. (시럽이 추가된 탄산수는 3코펙, 일반 탄산수는 1코펙)

 

거리의 탄산수 자판기는 날씨가 더운 5월부터 9월까지 운영되었으며, 모든 것이 얼어붙는 혹독한 겨울에는 특수금속상자로 덮여 가동을 중단하였다.


프리피야티의 자동판매기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흉물이 되었지만, 다른 지역의 자판기들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소련의 경제가 악화됨에 따라 자판기의 수익성은 떨어졌고, 결국 유지보수를 포기하면서 90년대에는 수많은 기계들이 고장난 장식물로 서 있다가 고철이 되었다.

 

프리피야티의 ‘소비에트 최고 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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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피야티에는 약 1만 2천 호의 아파트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위 사진의 9층 아파트가 가장 유명했다.

 

이곳에는 당의 고위층과 인민 지도자들이 거주했으며 체르노빌 원전의 책임자들도 살고 있었다. 도시의 엘리트들이 모여 산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이 아파트를 러시아 소련최고의회(Supreme Soviet of Russia)의 별칭인 벨리돔(Белый дом)으로 불렀다.

현재는 외장재가 떨어져 나가고 벽이 갈라지고 있어서 내부 접근은 위험한 상황이다.

 

전화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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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들이 모여 살던 ‘백악관’아파트 1층 건물 구석에 있던 전화부스의 모습.

 

전화기는 이미 뜯어갔고 누군가 괴기스러운 인형만을 갖다 놓았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이곳에 도착해서 전화를 걸고 만남을 가졌을 것이다.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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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피야티의 학교는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책도 여전히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다른 곳이 ‘약탈자’라고 불리는 도둑들에게 털린 반면, 학교의 책과 공책은 그들에게 탐나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탁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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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센터의 모습. 상단에 있는 글씨로 같은 공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프리피야티에는 5곳의 학교, 3곳의 문화센터, 놀이공원, 경기장과 수영장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수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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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면 프리피야티가 사고 후 완전히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도시를 청소하기 위한 공장과 실험실들이 들어섰고 이에 따라붙는 전기, 가스, 수도와 같은 인프라와 직원들의 여가시설도 있었다. 수영장 같은 경우는 1998년까지 운영되었다.

 

프리피야티 중앙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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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1985년 프리피야티의 중앙광장에서 사람들이 마슬레니차(Maslenitsa)를 축하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래는 같은 곳을 찍었다기엔 믿기 힘들지만 멀리 보이는 건물로 같은 위치임을 알 수 있다.

 

마슬레니차는 러시아의 전통 명절로, 러시아 정교회의 사순절(부활 주일 전 40일 동안의 기간)직전 일주일 동안 열리는 봄맞이 축제이다.

 

버스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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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피야티의 버스 시스템은 사고 이전에 매우 인기가 있었다. 철도보다 버스 인프라가 더 발달되어 있었기에 시민들은 버스를 더 자주 이용했다.

1982년 5월 21일, 프리피야티에는 14개의 버스노선이 있었으며 52대의 버스가 배차되었다.

 

놀이공원 관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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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피야티 놀이공원은 1986년 5월 1일 봄축제에 맞춰 개장할 예정이었지만 체르노빌 사고로 취소되면서 움직여보지도 못하고 영원히 멈춰 섰다.

 

사진 속 높이 26m의 관람차는 유령도시가 된 오늘날 프리피야티의 상징적인 모습이 되었다.

 

식료품 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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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식료품 마트의 모습.

 

프리피야티의 평균 연령은 26세로 매우 젊고 역동적인 도시였다. 당연히 결혼식도 많았기 때문에 웨딩샵도 여기저기 생겨났지만 1986년 4월 27일 오후 1시 10분, 도시의 일상은 몇 줄 문장에 의해 박살 났다.

시의회 인민대표의 ‘방사선 비상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라디오 방송 이후 같은 날 오후 5시 1,225대의 버스와 250대의 트럭에 실린 주민들은 집을 떠나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 순간만 해도 일시적인 대피였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아늑한 둥지를 영원히 떠나는 이주였다.

 

이후 급히 집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에게 잠깐 동안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었고, 물건에서 방사선이 측정되지 않는다면 가져갈 수 있었지만 대부분 폐기되었다. 현재 프리피야티의 아파트 내부가 대부분 비워져 있는 이유이다.

 

폴리시아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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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전 도시의 랜드마크였던 폴리시아 호텔(Polissya, Полісся)

 

당시 호텔 근처의 거리는 주민들이 직접 심은 50,000개 이상의 장미들로 장식되었고, 옥상에 있는 카페는 도시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낭만적인 장소로 꾸며질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사고 후 원전 폐기물이 수습되는 동안 호텔은 이곳에 투입된 청산인들과 군인들의 임시숙소로 이용되었다. 이후 호텔의 물건들은 높은 방사선량으로 인해 모두 땅에 묻혔고, 건물에 있던 쓸만한 설비들은 감시를 피해 몰래 들어온 도둑들이 쓸어갔다.

 

문화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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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건설과 함께 많은 프로젝트가 함께 진행되었다.

 

점점 커지는 도시에는 ‘Enerhetyk(Энергетик)’이란 이름의 문화궁전이 지어졌고, 콘서트와 각종 예능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이 곳은 아래의 프로메테우스 극장과 함께 소련 건물의 특징을 보여주는 프리피야티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였다.

 

프로메테우스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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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커지면서 중심가에 들어선 영화관 프로메테우스(Прометей).

 

이곳에는 이름에 맞게 고대 영웅 프로메테우스의 동상이 세워졌다. 놀이공원에서도 멀지 않았고 영화를 보면서 식당과 카페 등을 이용할 수 있는 종합시설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마치 영화가 끝나는 것처럼 도시의 움직임은 멈추었고 웅장했던 건물 근처에는 공허함과 황폐함만이 남아있다. 사고 후 청산작업을 할 때 이곳은 헬기 착륙장으로 사용되었고, 프로메테우스 동상은 원전 근처로 옮겨졌다.

 

죽음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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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리는 원전과 프리피야티를 잇는 다리로 웅장한 숲 위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일몰과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1986년 4월의 그날에 프리피야티 시민들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화재를 다리에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곳이 방사능 구름으로 덮여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고, 이것은 당시 다리 위에 있었던 사람들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의미했다.

 

사고 이후 차단되었으며 현재도 다리 위의 방사선량은 200μR이상을 나타내므로 건너 다닐 수 없다.

 

프리피야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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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후 방사선을 흡수한 프리피야티의 나무들은 붉게 물들었고 숲은 벌목되었다.

 

사고 발생지역 주변 4,760km² 는 최소 2만 5천 년 이상 인간의 거주지로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사실상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의미에 가깝다. 사고의 목격자와 외부인들은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과 피해상황에 대해 분석하고, 관광객들은 프리피야티의 쓰러져가는 건물과 제한구역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방문한다.

 

하지만 프리피야티에는 수많은 개인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산책을 하고 사랑을 하고 쇼핑을 하고 결혼을 하던 아름다운 인생들이 한순간 멈춰버렸다는데 생각이 닿으면, 이 사고는 단순히 방사선 수치나 사망자를 나타내는 숫자로 표현되는 이상의 끔찍함에 이른다.

 

체르노빌 원전 4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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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발생했던 체르노빌 원전 4호기는 6개월간 콘크리트 구조물로 밀폐되었으나 부식이 일어나면서 다시 방사선 수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당시 콘크리트 석관의 설계 내구연한은 30년에 불과했고, 현재는 2100년대까지는 버틸 수 있을만한 새 안전 덮개(New Safe Confinement)를 다시 덮었다. 돔의 높이는 108m로 유럽부흥개발은행(EBRD)과 45개국이 출원한 기금 15억 유로(한화 약 2조 원)가 건설비로 소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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