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얼떨결에 세계 최고령이 된 한국 할머니
기네스북에 기록된 역사상 최고령자는 프랑스 여성 잔 칼망(Jeanne Calment, 1875~1997)으로 122세 164일을 생존하며 인류 중 유일하게 120년 이상을 산 인물로 남아있다. 130년 이상을 살았다는 케이스도 있긴 하지만 이는 모두 정확하지 않은 출생기록으로 인해 공인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잔 칼망 조차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외모 때문에 ‘실은 1997년에 사망한 그녀의 딸이 진짜 잔 칼망이었고, 딸이 어머니인척 하고 살아온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도 했었다.
▲ 70세의 잔 칼망(1945년), 115세 생일에 담배를 피는 잔 칼망
한국에 등장한 ‘3882세’의 노파
그런데 1972년, 서울에 거주하는 김선행(金善行)이라는 3,882세의 할머니가 정정하게 살아있다는 뉴스가 보도되며 화제가 되었다.
– 우리나라의 개국시조인 단군황제의 태평성시에 태어난 사람이 아직도 서울 한복판에 건장한 모습으로 살아있다. 동대문 평화시장서 아동복점을 경영하고 있는 김선행 할머니(서울 성북구 종암동 9-54)는 단기 423년 3월 15일생. 【동아일보 1972.04.18】
이는 단군신화 속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1908세)보다도 무려 두배를 산 것이고, 성경 속의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사건을 일으켰던 시점보다도 700년을 앞서 태어난 것이다. 기원전 20세기에 출생기록을 할리도 없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는 ‘기록상의 실수‘였다.
사실 김선행 씨의 진짜 나이는 「1910년 3월 15일생」으로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 천남동에서 태어났고, 1929년에 결혼하여 혼인신고를 하고 살다가 해방과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
이후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면서 1948년에는 ‘월남가족을 대상으로 한 호적법 179호‘가 공포되었다. 이때 취적 신고를 담당한 종로구청 직원이 김선행 씨의 나이를 단기 4243년이 아닌 ‘단기 423년‘으로 오기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해방 직후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서기보다는 단기가 주로 사용되었다)
▲ 세계 슈퍼최고령이 된 김선행 여사
몇 년 후에야 이 사실을 감지한 김선행 씨는 수정을 요구했으나 구청은 ‘담당직원이 바뀌었다‘며 발뺌하였고, 사실 생활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그녀도 복잡한 절차가 귀찮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한동안 4000살에 가까운 나이로 살았다고 한다.
두 번째 오류
그러던 중 1961년 5.16 직후 ‘연호에 관한 법률 395호‘가 공포되면서 1962년 1월 1일부터 모든 공문서에 서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때 종로구청 담당직원은 김선행 씨의 나이가 ‘단기 423년’으로 기록돼있자 본인에게 확인도 하지 않고 ‘4223을 423으로 줄였나 보다‘라고 임의로 판단하고 단기 4223년에 해당하는 ‘1890년‘으로 기입하였다.
– 종로구청 담당직원은 김 할머니의 생년이 단기 423년으로 오기된 것을 발견,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붙여 4는 42를 줄인 것으로 판단. 4223년에 해당하는 서기 1890년으로 기재함으로써 김 할머니는 또 두 번째의 엉터리 나이를 지녀야 했다. 【동아일보 1972.04.18】
나이가 수천 살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실제 나이보다는 20세가 더 많은 나이가 된 것.
가정주부라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던 김선행 씨도 어느 날 막막한 상황을 겪게 된다. 1968년의 주민등록증 발급 때에는 실제 생년인 1910년이 기재되면서 호적과 주민등록증 사이에 연령 모순이 발생한 것. 이로 인해 인감증명을 발급받을 수 없게 되면서 본인 명의의 부동산을 매도할 수조차 없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제야 가족들까지 나서서 수정을 요구했으나 여전히 구청의 실무자들은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책임을 회피하였다.
결국 ‘실제보다 20세나 더 많은 82세라는 나이 때문에 정신적인 피해도 크다’며 서울민사지법에 호적정정 허가신청서를 냈으나 이번에는 법원도 기각 판결을 내렸다.
– “호적나이 때문에 앞서 늙는 것 같다” 고 정신적 피해를 강조하는 김 할머니는 “죽기 전에 나이만은 꼭 고쳐 놓겠다”는 욕심으로 지난 3월 호적정정 허가신청서를 서울민사지법에 냈으나 “이유없다“고 기각 판결을 받았다. 【동아일보 1972.04.18】
호적을 정정하기 위해서는 출생 시 의사의 증명이나 조산원의 진료일지 등이 필요하지만 북한에 모든 기록이 있는 김선행 씨의 경우에는 이를 바로잡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재판 이후 ‘병원으로 가서 연령 감정서를 발급받아 다시 소송하겠다‘고 하던 김선행 씨는 과연 그 후 나이를 고쳤을까? 이후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도 언론에 오르내린 만큼 결국은 수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혼란과 무사안일 시대의 산물이었던 호적 문제
이 시기 호적 문제로 인해 혼란을 겪은 것은 김선행 씨뿐만이 아니었다. 1965년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의 관내 33개 시읍면의 호적 감사에 따르면, 그 작은 지역에서만도 200건의 오류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서울이나 대도시는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또 월남가족들의 경우에는 일가친척 중 대표자 한 명이 동사무소를 방문해 모든 친족들의 이름을 적어내야 했는데, 가깝지 않은 친척의 이름이나 생년월일을 기억하지 못해 엉뚱하게 적어내고 오는 경우도 많았다.
북쪽에서 지주계급이나 기독교인으로 살았던 피난민들의 경우에는 남쪽이 또다시 적화되었을 경우 체포당해 처형당할 것을 우려해 스스로 가명을 적고 일종의 신분세탁을 하는 사례도 있었다.
▲ 1950년, 6.25전쟁 직전의 영락교회
서울 중구에 위치한 영락교회의 초창기에는 신도들이 대부분 서북지방(평안도) 출신이었다.
이들이 예배일을 맞아 교회를 찾았다가 오랜만에 반가운 고향사람들을 만났는데, 서로 얼굴은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 이름이 알고 있던 것과 달라 당황했다는 웃지 못할 사연도 이런 이유로 생겨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