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진의 뒷이야기 ⑮ 시대를 앞서간 자동판매기
빅토리아 시대, 런던 거리의 ‘가로등 자판기’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촉발시키면서 기술과 산업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그 결실로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발명품들이 등장했다.
지금은 거리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자동판매기‘라는 개념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1897년 브뤼셀 국제박람회(Brussels International Exposition)에서 뜨거운 물과 차, 소고기 수프, 코코아, 우유, 커피를 가로등(Pluto Lamps) 아래 설치된 자동판매기를 통해 공급하는 모습이 시연되었다.
▲ 1899년, 런던 엑스머스 마켓(Exmouth Market)의 가로등 자판기
이 가로등 자판기는 1896년 H.M. 로빈슨이라는 사업가가 개발한 것으로, 1898년 레스터 광장에 최초로 설치된 것을 필두로 런던거리 곳곳에 생겨나 시민들은 0.5페니 동전을 넣고 따뜻한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이 일회용 종이컵이 대량 생산되어 저렴하게 공급되는 시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쇠사슬로 고정된 머그컵을 이용자들이 모두 함께 사용하였다. 또 상업적인 용도뿐만 아니라 행인들이 절도 등의 범죄를 당하거나 목격하였을 때 경찰에 신고할 수 있는 전신기도 비치되어 있었으며, 엽서와 담배를(1페니 당 4개비) 판매하는 편의시설로도 기능했다.
▲ 자판기와 연결된 런던 경찰국의 전신기(Steljes ABC type printing telegraph receiver No. 477)
칙칙한 날씨로 유명한 런던의 칠흑같이 어두운 밤거리에서 환한 가로등 아래 따뜻한 차가 제공되는 시설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풍경이었을 것이다.
1899년 2월 8일 자 모닝포스트는 새로운 문명의 결정체인 가로등 자판기가 성공가도를 달릴 것으로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예상이 무색하게도 가로등 자판기는 그해 10월을 넘기지 못하고 모조리 철거되는 결과를 낳았다.
▲ 자동판매기 부분
1899년 4월 6일 자 데일리메일의 보도를 통해 그 원인 중 하나를 짐작할 수 있다.
가로등 자판기가 막 설치된 2월부터 4월까지의 수익을 회수하기 위해 업체에서 동전 케비넷을 열었을 때, 그곳에는 0.5페니 동전 대신 양철을 두드려 만든 가짜 동전 1,000개 이상이 수북이 쌓여있었다는 것.
▲ 1860년, 0.5페니 동전
세상은 빠르게 발전했지만 그 속도만큼 아직 올바른 시민의식과 관련법안이 자리잡지 않은 시대에 자동판매기는 너무 앞서 나간 개념이었던 것인지 런던시민 대다수는 사람이 아닌 무인기계와의 거래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