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진의 뒷이야기 ⑰ 1927년, 아령 살인사건과 전기의자 처형

일렬로 진열된 카메라

환한 표정의 신사들이 각자의 카메라를 난간에 진열한 모습. 마치 카메라 동호회 행사라도 열린 분위기다.

 

1927년 3월 20일 새벽, 함께 귀가한 남편이 잠든 사이 브라운은 아래층의 방에 미리 숨어있던 그레이를 불러냈다. 1


하지만 이 사진은 1927년 4월 중순, 미국 뉴욕 퀸스카운티 법원에서 열린 살인사건 재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는 기자들을 담고 있다.

 

사진 한 장을 꽉 채운 12대의 카메라로 사건의 중대성을 짐작할 수 있는데, 재판의 주인공은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루스 브라운(Ruth Brown)과 그녀의 애인 헨리 저드 그레이(Henry Judd Gray)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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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퀸스카운티 법원 밖의 인파


당시 법원밖에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200석의 법정에 들어가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들을 상대로 재판과 관련된 엽서와 단추 등의 기념품을 판매하는 상인들도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령 살인사건

사망한 피해자는 앨버트 애드워드 스나이더(Albert Edward Snyder)라는 저명한 아트 디렉터였다.

 

그는 약혼녀가 결혼 직전 갑작스럽게 폐렴으로 사망해 상심해있던 상황이었는데, 이때 전화교환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매력적인 13세 연하의 루스 브라운을 만나며 다시 가정을 꾸릴 결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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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 앨버트 스나이더(Albert Snyder)


가난했던 루스 브라운 입장에서도 나이 차이가 좀 있긴하지만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결국 두 사람은 1915년 7월 23일 결혼식을 올렸고, 3년 만에 딸 로레인을 낳으며 무난한 부부생활을 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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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당시의 루스 브라운


그러던 1927년 3월 20일 새벽 1시 45분, 부부는 지인의 집에서 밤늦게까지 이어진 가족파티에 참석한 뒤 귀가하였다.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난 딸 로레인(9)은 엄마가 팔다리가 묶인 채로 방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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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 로레인 스나이더


루스 브라운은 “검은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5시간 동안 때리고 이렇게 묶어놓고 갔단다!“라며 아빠에게 가보라며 울부짖었다. 로레인은 엄마의 결박을 풀어주고 아빠의 침실로 달려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사망한 시신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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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겨지는 앨버트 스나이더의 시신


시신은 아령 같은 것으로 머리를 맞은 흔적이 역력했기에 언론은 이를 ‘아령 살인사건‘이라고 보도했다.

 

강도 침입이라기엔 수상한 현장

사건 발생 후 현장을 찾아온 경찰들은 돈을 노린 강도들의 충동적 범행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허술한 부분이 많음을 간파했다.

 

1. 외부인이 강제로 침입한 흔적이 전혀 없는 것.

2. 남편이 눈앞에서 살해되는 것을 목격한 것 치고는 아내에게서 공포심을 발견할 수 없는 것.

3. 강도가 묶었다기엔 밧줄이 단단히 결박되지 않은 것.

4. 다섯 시간 동안 의식을 잃을 정도로 맞았다고 하기엔 멍이나 붓기가 전혀 없는 것.

5. 도난당한 보석이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서 발견된 것.

6. 저택의 지하실에서 살해도구가 발견된 것. (아령이 아니라 창문을 올릴 때 사용하는 추였다)


결정적으로 경찰의 유도신문에 그때까지만 해도 가련한 미망인으로 여겨졌던 루스 브라운은 중대한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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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이 발생한 집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 사건 현장에는 남성의 것으로 보이는 ‘옷깃에 꽂는 핀(라펠 핀)’이 떨어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JG‘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경찰은 곧 루스 브라운의 전화번호부에서 이니셜과 일치하는 ‘저드 그레이(Judd Gray)’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라펠 핀에 대한 이야기는 감춘 채 경찰은 루스 브라운에게 “저드 그레이는 지금 어디 있죠?“라고 떠보았는데, 갑작스럽게 애인의 이름이 경찰의 입에서 나오자 당황한 그녀는 “그가 자수했나요?“라고 되물었다. 경찰은 미끼를 문 그녀에게 “그렇습니다“라고 답했고 결국 모든 범행을 자백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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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깃에 꽂는 라펠 핀(lapel pin)


흥미롭게도, 결정적인 자백을 이끌어냈던 ‘
JG‘가 새겨진 라펠 핀은 저드 그레이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해자 앨버트 스나이더의 것으로 ‘JG’는 결혼 전 갑작스럽게 사망한 그의 전 약혼녀 ‘제시 기샤드(Jessie Guischard)’의 이니셜이었다.

 

경찰의 착각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사랑했던 여성의 유품이 빠른 사건해결의 열쇠가 된 셈이었다.

 

불륜남녀의 계획범행

악연으로 끝난 앨버트 스나이더와 루스 브라운의 10여 년간의 결혼생활은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데다가 성격도 맞지 않아 지루한 나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루스 브라운은 1925년의 어느 날, 카페에서 점심을 먹던 중 우연히 헨리 저드 그레이라는 여성속옷 판매원과 눈이 맞는다. 둘 다 배우자와 동갑내기 딸이 있는 불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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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범 그레이와 루스


사랑이 없는 결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새 출발을 하고 싶었던 그녀는 ‘걸림돌‘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열차 승강장에서 밀치거나, 음식에 쥐약을 넣고, 술에 수면제를 타는 등 1년간 7번의 살해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자 결국 애인 그레이에게 작전(?)을 도울 것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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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 직전 마지막 사랑까지 나눈 두 사람은 앨버트 스나이더의 침실로 들어가 목에 철사를 두르고 입에는 클로로포름을 적신 솜을 쑤셔 넣었다. 저항이 만만치 않자 루스 브라운은 창문 추를 가지고와 남편의 머리를 때려 절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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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거로 제출된 범행도구들


이들은 사건이 이탈리아인 강도의 침입으로 발생한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집안을 어지럽히고 나름 치밀하게 이탈리아 신문을 흩어놓았다. 그리고 그레이는 브라운을 묶은 후 서둘러 달아났다.

 

이후 체포된 그레이는 자신은 범행과 무관하다고 주장했으나 경찰로부터 브라운이 자백을 했다는 것을 듣고 범죄에 가담했음을 실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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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포된 루스 스나이더


범행을 실행하기 전 브라운이 남편에게 생명보험에 가입할 것을 종용했던 것도 드러났다.

 

앨버트는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아내의 거듭된 요구에 1,000달러(현재가치 약 16,000 달러) 정도의 보험에 가입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 몰래 서명을 위조해 48,000달러(현재가치 약 80만 달러)의 보험에 추가로 가입했다. 특히 강도나 폭행 등으로 사망하면 ‘보상금의 두배’를 수령할 수 있는 시커먼 속내가 보이는 상품이었다.

 

이런 고액 보험의 존재를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남편이 알아채면 보험을 해지할 것은 당연한 상황. 이는 보험계약이 소멸되기 전에 서둘러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화제가 된 재판과 사형

불꽃같은 사랑 때문에 이 모든 일을 벌인 두 사람이었지만 재판정에서는 철저히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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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정의 루스 스나이더


그레이는 “절대 피해자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며 “브라운이 내 아내에게 불륜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했다“고 주장했다.

 

브라운 역시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그레이가 나서서 도와준 것“이라며 살인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증언으로 일관하였지만 퀸스카운티 검찰은 두 사람을 공범으로 기소했고, 결국 1급 살인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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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7월 25일, 퀸스카운티 구치소의 루스 브라운


이후 뉴욕 싱싱교도소(Sing Sing Prison)에 수감된 루스는 1928년 1월 12일 오후 11시 6분, 유명한 사형집행인인 로버트 G. 엘리엇(Robert G. Elliott, 1874~1939)의 주관하에 전기의자에 앉아 생을 마감했다. 공범 그레이도 8분 뒤인 오후 11시 14분에 전기의자에 앉아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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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스 브라운의 사형집행


루스 브라운이 가면이 씌워지기 직전에 겁에 질려 외친 말은 누가복음 23장 34절의 구절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n’t know what they are doing)였고, 저드 그레이는 “아내가 나를 용서한다는 편지를 보내왔다“며 미소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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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1월 13일자 데일리뉴스 1면


100년 전이라 해도 당연히 사형장에서의 사진촬영은 철저하게 금지되어있었는데, 위와 같이 집행 순간의 사진이 남아있는 것은 놀라운 일. 이는 당시 선정적인 타블로이드 신문으로 인기를 끌던 데일리뉴스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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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톰 하워드의 발목 카메라


당시 데일리뉴스의 기자들은 자극적인 취재로 악명이 높은 터라 교도관들에게도 얼굴이 알려진 관계로 참관이 거부되었다. 이에 협업사인 시카고 트리뷴의 사진작가 톰 하워드(Tom Howard)를 섭외하였고, 그는 소형카메라를 발목에 매달고 들어가 역사적인 사진의 도촬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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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톰 하워드가 발목 카메라를 차는 모습


사형집행 다음날인 1월 13일 데일리뉴스는 호외를 발간했고, 사람이 전기의자에 앉아 처형당하는 광경을 볼 일이 없었던 시민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어 발간된 1월 14일 정기판 데일리뉴스는 추가 인쇄까지 거치며 100만 부가 팔리는 등 평소 판매량의 두배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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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1월 14일자 데일리뉴스 1면


비록 범죄자들이지만 인간의 생명을 놓고 벌이는 선정적 보도에 분노한 주 정부는 사진을 몰래 촬영한 톰 하워드와 데일리뉴스를 기소하려고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이후 애꿎은 사형집행 참관인들만 철저한 몸수색을 당해야 했고, 혹시나 감시를 뚫고 숨기고 들어간 카메라의 촬영을 방지하기 위해 셔터를 조작할 수 없도록 참관인들은 두 손을 보이게 들고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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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집행 장면과 함께 진열된 톰 하워드의 카메라 (스미소니언 국립미국역사박물관 소장)


미국 역사상 유일한 전기의자 사형집행 사진
을 찍은 톰 하워드는 그 대가로 100달러(현재가치 1600달러)를 받았다. 데일리뉴스가 거둔 수익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돈이지만 그는 하루아침에 유명한 사진작가가 되어 백악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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