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거짓말, 가짜 원시부족 ‘타사다이(Tasaday)’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마누엘 엘리잘드(Manuel Elizalde)라는 이름은 한때 필리핀에서 가장 유명한 사업가이자 자선가의 대명사였다.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1917~1989) 대통령의 측근으로써 엘리잘드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는데, 그런 그가 대통령 직속 소수민족지원단체(Presidential Assistance on National Minorities, Panamin)의 운영을 맡으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 마누엘 엘리잘드(1936~1997)
원시부족과의 만남
필리핀 전역에 흩어져 사는 소수민족들을 관리하던 엘리잘드는 1971년 초, ‘민다나오 섬 북쪽 끝에 있는 울창한 밀림에 소수의 원시부족이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순간 그의 뇌리에는 세계를 놀라게 할 ‘잃어버린 부족’이라는 타이틀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엘리잘드는 즉시 의사와 통역사, 경호원을 대동하고 헬리콥터로 현장에 도착했다.
▲ 내셔널 지오그래픽 1972년 8월호
그의 말에 따르면 26명 정도의 원시인들이 바나나 잎과 풀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었고 본인들이 살고 있는 동굴 근처를 떠나지 않고 살아왔으며, 자신들이 지구의 유일한 인류라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엘리잘드는 이들은 바다를 본 적도 없고 쌀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며 ‘대발견’에 흥분했다.
이는 예상대로 세계인류학계를 강타했다. 1만 년간 외부와 고립되어 살아온 ‘타사다이 족(Tasaday)’은 지구 최후의 순수함을 간직한 때 묻지 않은 부족이라는 낭만적인 묘사로 세계에 소개되었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타사다이어에는 ‘전쟁’을 의미하는 단어가 없었고, 폭력은 물론 어떤 공격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사랑의 원시부족’으로 불리며 당시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의 물결 속에 피어난 한줄기 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 타사다이족이 하루동안 채집한 식량 소개(내셔널 지오그래픽 1972년 8월호)
세계 언론도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필리핀 최남단의 섬에는 소수의 원시부족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인류의 가장 초기단계에 머물러있다”며 흥분했고,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는 1972년 8월호의 표지로 타사다이족 소년이 나무를 오르는 모습을 실었다. 32페이지의 타사다이족 특집기사와 함께였다.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는 필리핀의 국가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타사다이족을 이용했다. ‘노트르담의 꼽추’의 주연배우로 유명한 지나 롤로브리지다를 초청하여 타사다이족을 소개했고, 전설적인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에게도 이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타사다이족의 존재는 당시 정적을 무차별 공격하던 마르코스 정부의 잔혹성을 희석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외부와 다시 차단
최초 발견자 마누엘 엘리잘드는 스스로를 ‘타사다이족의 수호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타사다이족에 접근할 수 있는 외부인(주로 영화배우나 유명인)을 본인의 관리하에 철저히 제한했으며, 더 확실한 폐쇄를 위해 대통령 마르코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1976년, 마르코스는 ‘타사다이와 다른 미개척 공동체를 무단진입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타사다이족이 거주하는 동굴 주변의 땅 182㎢를 접근금지구역으로 선포했다.
▲ 타사다이족 근거지 위치
어떤 사람이나 언론도 접근이 차단되자 타사다이는 어느새 세계인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영원한 순수함을 보장받는 듯이 보였다. 찰스 린드버그나 존 록펠러 4세 등 저명인사들도 이런 필리핀 정부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소수민족 보호에 써달라며 거액의 기부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거대한 사기극의 실체
1986년 3월, 마르코스가 필리핀에서 축출되며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스위스 언론인 오스왈드 이텐(Oswald Iten)이 필리핀 기자 조이 로자노(Joey Lozano)를 대동하고 민나다오섬을 방문했다.
민다나오섬의 사람들은 타사다이족에 대한 질문을 하는 기자들에게 먼저 “이 이야기가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알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기자들은 현지인들에게 타사다이족이 사는 곳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필리핀 전역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열대우림이라는 이야기와는 달리 “거기까지 ‘걸어서’ 하루면 갑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 현장을 방문한 오스왈드 이텐 기자(좌측)
실제로 가까운 공항에서 동굴까지 초행길임에도 불구하고 도보로 하루반이 소요되었기에 기자들은 어째서 학자들이 원시부족과 외부의 근접성을 알아보지도 않고 이 이야기를 믿었는지 기이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엘리잘드는 ‘오로지 헬리콥터로만 접근이 가능하다’고 속이며 외부인들을 농락한 것이었다.
예고 없이 도착한 타사다이족의 동굴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다만 근처의 촌락에 허름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타사다이족이었다.
▲ 타사다이족이 연기를 하던 동굴
애초 동굴에 살아본 적도 없는 부족민들은 외국인이 왔을 때 원시인 연기만 해준다면 돈과 물자를 제공한다는 엘리잘드의 말에 동굴이라는 무대를 마련하고 옷을 벗고 원시부족 서커스를 했다고 고백했다.
▲ 평상복을 입고 있는 원주민들
사실 이 허접한 사기극을 꾸미는 데에는 치밀한 계획도 필요 없었다. 단지 신과 같은 전능한 권력 하나로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이다. 타사다이족에게 있어서 엘리잘드는 생사를 관장하는 신과 같았다. 엘리잘드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부족민들은 그의 보복이 두려워 동굴 근처를 떠나지 않고 살고 있었다.
▲ 티셔츠를 입은 타사다이족이 기자들이 들고간 70년대에 찍은 본인의 모습을 보고 웃고 있다.
숲에서 돌아오자마자 이텐과 로자노는 동굴에는 사람이 살지 않으며 타사다이족은 엘리잘드가 만들어낸 부족. 즉 석기시대의 삶을 사는 것처럼 꾸며진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폭로했다.
이후의 진실공방
1990년대 중반, 미국의 로렌스 A. 레이드(Lawrence A. Reid) 박사는 타사다이족과 그 주변 부족의 관찰에 나섰다.
그는 “이들이 고립되어 있는 것은 맞고 수렵생활을 하며, 언어 역시 다른 부족들과는 다른 방언을 사용한다. 하지만 고립이라 해도 만년이 아니라 150년 정도이고, 1950년대 즈음에 타부족과 접촉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타사다이족이라는 고유언어를 가진 고립된 수렵 부족 자체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석기시대 문화로 살고 있다는 것은 과장이라는 이야기였다.
▲ 현재의 타사다이족
하지만 오스왈드 이텐 기자는 이런 ‘절반의 사실’이라는 논리를 펴서 체면치레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타사다이족이 진짜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간단하다고 말했다.
1. 근처의 부족들과 DNA 검사를 통해 실제로 고립된 부족인지를 확인하는 것.
2. ‘진짜’ 과학자와 인류학자들이 동굴 근처의 현장에서 연구하는 것을 허용할 것.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옹호론자들은 시행하지도 않고 침묵을 지켰다.
오스왈드 이텐이 만난 타사다이족들은 그저 소외받은 희생양에 불과했다. 정부에 의해 거주지가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이들을 비롯한 근방의 소수민족들은 정부와 비정부기관으로부터 완전히 방치되는 길로 내몰리며 필수의료와 교육은 고사하고 생필품까지 구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
권력자들은 ‘보호’가 아닌 ‘봉쇄’로 돈과 국가 이미지를 위해 착취할 수 있는 인간 사파리를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 1997년, 오토바이를 타는 타사다이족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지고 필리핀을 탈출한 마누엘 엘리잘드는 죽을 때까지 ‘잃어버린 부족을 찾았다’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타사다이 보호재단(Tasaday Community Care Foundation, TCCF)까지 설립했다.
또 타사다이족들을 회유하여 이를 사기극이라고 주장하는 필리핀 학자들을 고소하게 하거나 자신을 옹호하는 서구의 언론인들을 초청해 동굴이 아닌 본인의 집 거실에서 타사다이족과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필리핀에 귀국한 그는 타사다이족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의 돈을 착복했다는 의혹과 함께 타사다이족과 소수부족의 사진들을 팔아 1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챙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엘리잘드가 1997년 사망하면서 그가 이 희대의 사기극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보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