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백정과 놀았다는 이유로 영업정지 당한 기생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도살이 주업이었던 백정(白丁)은 현재 인도의 불가촉천민과 같은 하층민이었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을 통해 신분제는 철폐되었으나 대중들의 인식이 하루아침에 달라졌을 리 만무했고, 조선이 맥을 다했음에도 이들에 대한 차별은 일제시대까지도 이어졌다.

 

아래의 ‘백정과 놀아난 기생 퇴출사건’은 당시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신분제의 잔재를 보여주고 있다.

 

– 대구 기생 풍파
– 기생 9명 폐업
– 백정과 놀았다고

 

대구 기생조합에서는 지난 8일 오후 2시경에 그 조합 사무소에서 현역 기생 전부와 밑으로 앉은 퇴기까지 소집하여 무슨 중대한 문제로 일대 풍파를 일으켰다는데 그 내용을 들은즉,

지난 음력 사월초파일에 당지 명치정 부근에 있는 백정들이 현역 기생 아홉 명을 데리고 금호강가에서 놀음을 논 일인데, 그 백정들이 놀음을 계획할 때 기생을 부르기로 하고 조합과 밑 기생들에게 그 의사를 표시한바 조합과 기생들은 응종치 아니하겠다는 의향을 표시했다. 그러자 놀음을 나가는 당일에 백정이 아닌 오입쟁이를 시켜 아홉 명의 기생에게 야외 산보를 가자고 유인하여 현장까지 나가 결국은 놀음에 불린 기생이 되고 말았다.

 

그 중간의 내용이 여하히 된 것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이것은 재래의 습관상 풍기를 문란케 함이라 하여 조합간부가 모여 조합 명부에 오른 기생 전부와 들어앉아 살림하는 기생 수백 명을 소집하여 결의하기를 “백정의 놀음에 기생이 불리는 일에 대하여는 큰 수치인바 이 일은 결코 그저 둘 수 없는 일인즉, 금번에 놀음 갔던 기생은 전부 폐업을 시키자”는 문제로 만장의 결의가 되어 그 결정은 총회를 소집하고 다수의 오입쟁이를 초대하여 일반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기로 하고 전기 아홉 명의 기생에 대하여는 이 문제가 결정되기까지는 놀음을 다니지 못하게 영업장을 회수하였다더라.

 

■ 기사 요약: 1922년 사월초파일(5월 4일), 대구지역의 백정들이 명절을 맞아 모임에 기생을 불렀다. 그런데 기생들은 돈을 준다고 해도 '백정'이라는 이유로 이 제안을 거절했다. 1
【매일신보 1922.05.11】

 

기사 요약: 1922년 사월초파일(5월 4일), 대구지역의 백정들이 명절을 맞아 모임에 기생을 불렀다. 그런데 기생들은 돈을 준다고 해도 ‘백정’이라는 이유로 이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백정들은 다른 사람을 시켜 기생 9명을 불렀고, 속아서 나온 기생들은 할 수없이 모임에서 흥을 돋운 모양.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대구 기생조합이 조합원 전체를 소집하고 해당 기생들이 속아서 갔음에도 영구 자격정지(?)의 중징계를 내리게 되었다.


근대의 기생들도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생활과는 달리 사회적 인식으로는 하층민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으로 볼 때, 백정에 대한 당시 사회의 인식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사건은 계급사회였던 조선이 근대로 나아가지 못해 결국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도 여전히 하층민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가 남아있는 서글픈 풍경이다. 결국 이듬해인 1923년 4월 24일, 백정 출신 지식인들과 사회운동가들이 주도한 형평사 운동(衡平社運動)이 시작되었다.

 

■ 기사 요약: 1922년 사월초파일(5월 4일), 대구지역의 백정들이 명절을 맞아 모임에 기생을 불렀다. 그런데 기생들은 돈을 준다고 해도 '백정'이라는 이유로 이 제안을 거절했다. 3
▲ 형평사 1주년 기념식(동아일보 1924.04.27) / 거창 형평사 설립(동아일보 1926.06.30) / 형평사 총본부 창립 5주년 기념식(동아일보 1929.01.04)


여전히 남아있는 신분제의 잔재를 씻어 없애 버리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미래지향적 사상을 뚜렷하게 선보인 
형평운동의 시작 배경에는 시대변화에 따른 직업상실의 위기,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거론되고 있지만, 위의 기생폐업 사건처럼 일상에 깃들어있던 사람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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