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최초의 볼걸, 말라 콜린스(Marla Collins)
공을 가지고 하는 스포츠인 구기종목에서는 장외에서 공을 줍거나 보조업무를 맡는 인력이 있다.
이를 성별에 따라 ‘볼걸(Ball Girl)’ 혹은 ‘볼보이(Ball Boy)’라고 칭하는데 구기종목이지만 도구가 쓰이는 야구에서는 배트걸(Batgirl), 배트보이(Batboy)라는 호칭이 쓰이기도 한다.
최근에는 KBO리그에서 흔히 배트걸과 볼걸을 볼 수 있지만, 백 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MLB)에서도 볼걸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 KBO 리그의 볼걸들
메이저리그 최초의 볼걸
MLB의 시카고 컵스는 과거 108년 동안(1908~2016)이나 우승을 못했던 패배의 아이콘으로 유명했다.
컵스의 가장 긴 암흑기라면 가을야구를 구경조차 하지 못했던 1945년부터 1984년까지의 기간인데(물론 1969년 이전까지 디비전시리즈가 없었던 것에도 기인한다), 1984년에 무려 39년간의 방황을 끝내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것도 사이영상 투수(릭 서트클리프)와 MVP 타자(라인 샌드버그)까지 함께 배출한 시즌이었다.
이 80년대의 짧은 중흥기 동안 컵스의 홈구장을 누비는 눈에 띄는 볼걸이 등장했는데, 바로 MLB 최초의 볼걸로 회자되는 말라 콜린스(Marla Collins)였다.
▲ 시카고 컵스의 볼걸, 말라 콜린스
1982년부터 시카고 컵스의 볼걸로 활동한 말라 콜린스는 처음에는 컵스의 지역 라이벌인 화이트삭스의 홈구장 코미스키 파크(Comiskey Park)의 맥주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일찍이 화이트삭스는 ‘야구+맥주+미소녀’의 조합이 남성팬들에게 인기가 있을 거라는 걸 인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야구 개막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컵스의 구단 관계자들이 코미스키 파크를 방문했다. 그들은 맥주를 팔고 있던 콜린스에게 접근해 ‘혹시 리글리필드에서 일하는데 관심이 있느냐’라고 물어왔다. 일종의 스카우트 제의였던 셈인데 콜린스는 당시만 해도 볼걸로 일하게 될 줄은 몰랐고, 홍보행사와 안내등을 맡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 리글리 필드의 스타였던 모습
난데없이 생소한 볼걸로 활동을 시작한 콜린스는 게임당 150달러(2023년 가치 $472)를 받기로 계약했고 컵스의 홈경기는 81경기였기에 한 시즌 12,150달러(2023년 가치 $38,291)가 수당으로 지불되었다.
엄청난 금액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전설이 된 컵스 경기 중계 아나운서였던 해리 캐리(Harry Caray, 1914~1998)가 ‘어디 지금은 말라가 뭘 하는지 볼까요~’라고 언급하면서 시시때때로 그녀를 화면에 잡아주었고, 1984년에는 팀이 그토록 갈망하던 포스트시즌까지 나가면서 콜린스의 인기도 연예인처럼 치솟았다.
▲ 컵스 암흑기 시절에 한줄기 빛이었던 콜린스
물의를 일으킨 볼걸
그런데 이런 큰 인기를 누리던 콜린스가 1986년 7월 22일, 돌연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에 나체로 등장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성인잡지에 등장해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모습
분노한 시카고 컵스 측은 그녀가 ‘구단의 가족 같은 분위기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즉각 해고 조치했다. 하지만 ‘가족 같은 직원’에게 짧디 짧은 핫팬츠와 몸에 달라붙는 상의를 입힌 것도 컵스 구단이었기에 잡지출연 문제로 해고하는 것은 위선적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사실 그녀가 해고된 원인은 당초 9월호나 10월호로 시즌 후반기에나 나올 예정이었던 문제의 잡지가 한창 시즌 중인 7월에 유포되었고, 결국 팀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민폐 행동으로 판단되었다는 게 중론이다.
▲ 연예인과 다름없었던 인기
당시 미 전역은 팝스타 마돈나가 주연으로 나선 영화(Desperately Seeking Susan)가 화제가 되고 있었지만, 적어도 시카고에서 만큼은 콜린스의 플레이보이 잡지 등장이 더 큰 화제가 되었다. 만약 컵스가 그녀를 빠르게 해고하지 않았다면 지역 언론은 선수나 경기 내용보다는 콜린스와의 인터뷰에 더 혈안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1986년 컵스의 성적은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뒤에서 세 번째에 자리했다)
말라 콜린스는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나는 어느덧 28세였고 영원히 볼걸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에 어차피 1986 시즌이 끝나면 그만둘 생각이었죠. 하지만 사진 촬영이 알려지자마자 해고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볼걸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플레이보이의 제의가 꾸준히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서는 하기가 힘든 직업이기도 하고 결혼으로 일을 그만둘 상황이 되자 제안을 받아들이며 소위 ‘익절’을 하게 된 것이다. (플레이보이는 콜린스에게 25,000~50,000달러 사이의 모델비를 지불한 것으로 추정된다)
▲ 시카고의 사랑을 받던 시절
당시 말라 콜린스는 이 사진 촬영이 전문 모델이나 연예계로 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거라고 기대했지만 결국 그녀의 인기는 ‘야구계 한정’이라는 것만 증명되었다.
훨씬 뛰어난 미모를 가진 여자배우들이 스크린과 TV에 많이 있지만 볼걸이라는 위치는 희소성이 있었다. 승부에 대한 긴장감으로 살벌함이 넘치는 남자 운동선수들 속에서 핫팬츠를 입고 밝게 웃고 있는 유일한 여성은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고, 미모 역시 경쟁자가 없기에 돋보였던 것뿐이었다.
또 다른 최초, 오클랜드의 볼걸들
한편 말라 콜린스가 ‘MLB 최초의 볼걸’이냐는 데에는 논쟁이 있다. 1971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여자들이 야구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두 명의 볼걸들을 고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력 넘치는 소녀들은 당연하게도 남자 선수와 팬들의 눈길을 끌었고, 결국 1974년 선수 아내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면서 폐지되었다.
당시 오클랜드의 볼걸로 활약했던 여성들은 데비 제인 시비어(Debbi Jane Sivyer)와 메리 베리(Marry Barry)였다.
▲ 데비 제인 시비어
하지만 이들은 시간당 5달러를 받는 임시직이었고, 파울볼을 줍기도 했지만 힐과 평상복을 입고 이닝 사이에 심판들에게 레모네이드나 직접 구운 쿠키를 가져다주기도 하는 등 볼걸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모습과 역할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팀과 동일한 다자인의 유니폼을 입고 ‘정규직 볼걸’로 등록된 말라 콜린스를 ‘MLB 최초의 볼걸’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 메리 베리
이중 직접 구운 쿠키를 제공하는 아이디어를 내놓던 데비 제인 시비어는 결혼 후 데비 필즈(Debbi Fields)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인 쿠키 업체인 미세스 필즈 쿠키(Mrs. Fields’ Original Cookies Inc.)를 창립하였다.
▲ 쿠키굽던 볼걸 시절의 데비 제인(좌), 쿠키업체 CEO 데비 필즈가 된 모습(우).
두 사람은 지난 2018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경기에 초청되어 시구를 하는 등 구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다.
▲ 시구하는 데비와 메리
이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것이 말라 콜린스이고, 그사이 시카고 컵스가 108년 만에 우승을 했음에도 전혀 추억의 스타로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면 1986년의 돌발행동은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평생을 두고 아쉬운 선택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