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여자 배우와 가수들

과거 수십 년간 전쟁에 휘말린 아프가니스탄이기에 이 나라의 인물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테러리스트나 저항군, 일부 정치인이 연상된다.

 

특히 21세기 초에 탈레반이 정권을 잡고 모든 음악과 영화를 금지시킨 정책의 여파가 현재까지도 미치고 있다. 사실상 1인 혁명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프가니스탄의 여성 연예인들.

 

아래는 현재 활동 중인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배우와 가수들로 대부분 ‘아프가니스탄계’라는 표현이 붙어있지만 이는 자유를 위해 해외로 탈출한 흔적으로, 일반적인 국가들의 교포나 이민자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아리아나 사이드(Aryana Sayeed)


– 1985년생

– 아프가니스탄계 스위스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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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카불 출생으로 페샤와르에 살다가 8세 때 가족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했다.

 

2008년 첫 번째 싱글 ‘Mashallah’를 발표해 큰 인기를 얻었고 탈레반이 물러간 고국에서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방송의 TV진행자로 활동하는 등 최고의 연예인으로 자리 잡았다.

 

2017년에는 아프간 아이콘 상(Afghan Icon Award)과 베스트 여성 아티스트로 선정되는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냈으며, 언론으로부터는 ‘아프가니스탄의 목소리(Voice of Afghanistan)’라는 수식어를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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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활동뿐 아니라 아리아나는 여성의 이름으로 신분증을 만들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WhereIsMyName 캠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등 여성인권에도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2021년 8월 탈레반이 카불을 함락하면서 급히 카타르로 대피한 뒤 현재는 터키 이스탄불에 머무르고 있다.

 

게잘 에나야트(Ghezaal Enayat)


– 1980년생

– 아프가니스탄계 캐나다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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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에서 태어난 그녀는 인스타그램에서 130만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 한때 가장 팔로워가 많은 아프가니스탄 가수였으나 현재는 아리아나 사이드(140만 팔로워)에게 역전당한 상태. 2011년 캐나다로 이주하면서 음반을 제작했으나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하다가 용기를 내 모습을 드러냈고 곧 인기스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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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는 이란,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등을 대상으로 하는 BBC 페르시안(BBC Persian) 방송의 올해의 베스트 아티스트로 선정되었고 해당 지역에서는 수백만명의 팬을 거느린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글로벌 스타이다.

 

모즈다 자말자다(Mozhdah Jamalzadah)


– 1982년 12월 27일생

– 아프가니스탄계 캐나다 가수,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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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정권에 반대하는 교사였던 아버지가 체포될 위험에 처하자 가족 전체가 파키스탄으로 탈출했다. 그녀의 나이 다섯 살 때였다. 이후 난민촌에서 망명을 허락받고 캐나다 온타리오 주로 이주했다.

 

모즈다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해 “캐나다는 매우 추운 곳이었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하루하루 살아남을 것에 대해 걱정하던 아프간 시절과는 비교되지 않는 불편함이었다.”라고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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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며, 학교를 다니는 아프간 여성들이 염산 공격을 당하는 이야기를 다룬 ‘도크타레 아프간(Dokhtare Afghan, Afghan Girl)’이라는 곡이 아프가니스탄의 TV와 방송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수많은 시상식을 석권했다. 덕분에 200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1TV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모즈다 쇼(Mozhdah Show)’의 사회자로 캐스팅하였으며 여러 금기된 주제들을 다루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오프라 윈프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방송은 카불에서 2009~2011년까지 방영되며 많은 여성들을 계몽하는데 이바지했으나, 휴가차 귀국했다가 카불로 돌아가려는 그녀를 캐나다 당국이 테러 위협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출국을 허가하지 않으면서 폐지되었다.

 

2010년 국제 여성의 날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도크타레 아프간’을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아 ‘백악관에서 공연한 최초의 아프가니스탄인’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아지타 가니자다(Azita Ghanizada)


– 1979년 11월 17일생

– 아프가니스탄계 미국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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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에서 일한 아버지의 경력 탓에 정치적 망명으로 갓난아기이던 시절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특히 다른 배우들이 아프간이나 난민촌에서 힘든 어린시절을 보낸 반면, 아지타의 경우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미국 문화와 부모가 지키길 원하는 고국의 풍습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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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 덕분에 연기에 대한 꿈을 키우다가 광고모델로 데뷔했고 다민족적인 외모 덕분에 어느 배역이나 어울리는 조연으로 꾸준히 출연을 하며 40여 편의 필모그래피를 쌓을 수 있었다.

 

하시바 에브라히미(Hasiba Ebrahimi)


– 1997년생
– 아프가니스탄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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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에서 태어난 하시바 에브라히미는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분쟁 중 파키스탄과 이란의 난민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2014년 카불로 돌아온 그녀는 영화계에 투신했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젊은이들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 ‘컨테이너에 갇힌 사랑(A Few Cubic Meters of Love)’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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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컨테이너에 갇힌 사랑’


2020년 11월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언니를 만나러 출국한 뒤 어머니의 만류로 현재까지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녀의 인터뷰에 따르면 어머니는 “엄마 말 잘 들어. 널 너무 사랑하지만 돌아오지 마. 널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할 순 없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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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의 젊은 층은 대부분 미군의 방패 뒤에서 성년이 된 세대로,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탈레반에 대한 큰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그 두려움은 지금 상황으로 볼 때 허황된 것이 아니다.

 

레일라 알리자다(Layla Alizada)


– 1977년 8월 10일생

– 아프가니스탄계 캐나다 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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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에서 태어났으며 가족이 캐나다 몬트리올로 이주했다. 1995년 18세의 나이로 연기를 시작해 40여 편에 달하는 영화와 TV시리즈에 출연했으며, 특히 TV영화 ‘체이징 프리덤(Chasing Freedom)’에서는 탈레반으로부터 탈출하는 아프가니스탄 난민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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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5일, 13년간 연애한 캐나다 배우 노엘 피셔(Noel Fisher)와 결혼했다.

 

페레슈타 카제미(Fereshta Kazemi)


– 1979년 6월 10일생

– 아프가니스탄계 미국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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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과 캘리포니아에서 자랐다.

 

2009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분쟁을 소재로 한 단편영화 ‘힐(Heal)’에서 첫 주연을 맡았으며, 2014년에는 ‘타겟팅(Targeting)’에서 아프가니스탄 이민자 아내 역을 연기했다. 이 영화에서 아프간 출신 여배우로는 첫 키스신을 연기함으로써 ‘선구자’라는 호칭을 받았다.

 

그 밖에도 아프가니스탄 영화 최초로 성폭행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아이시 선(The Icy Sun)’등 현실에 존재하지만 외면당하는 금기된 주제를 다룸으로써 논란과 지지를 동시에 받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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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페레슈타는 아프간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기 위해 3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카불 공항에 도착한 그녀는 탱크톱과 레깅스 차림이었는데 마중 나온 사촌이 놀라서 ‘재킷을 입으라’고 하며 달려들었을 정도로 비록 탈레반 정권은 아니었지만 여성에게 강압적인 사회분위기는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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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불 거리의 부르카를 입은 여성과 페레슈타


실제로 2005년에는 방송인 샤이마 레자이가 살해당했고, 페레슈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머무는 도중에도 베나프샤(22)라는 여배우가 촬영 도중 ‘비이슬람적으로 행동했다’며 칼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 샤이마 레자이 살해사건

 

글로벌 음악채널 MTV의 아프간 버전 방송 ‘Hop’의 사회자였던 샤이마 레자이(Shaima Rezayee, 1981~2005)는 아프가니스탄 역사상 최초의 서양음악방송 여성사회자였다. 당시 모자와 청바지 등을 입고 자유로운 몸짓으로 방송한 그녀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종교지도자와 사회 각계의 비판을 받았는데 가장 심한 비판을 가한 사람이 아프가니스탄 대법원장 파잘 하디 신와리(Fazl Hadi Shinwari, 1927~2011)였다는 점에서 당시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결국 2005년 3월 방송국에서 해고된 샤이마는 그해 5월 18일 카불의 집에서 총에 맞아 24세의 나이로 숨졌다. 2001년 탈레반이 축출된 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살해된 최초의 방송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레슈타는 보안이 철저한 아파트나 개인운전사를 고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카불로 돌아온 이유가 자신의 현대적인 모습을 국민들로부터 인정받고 계몽시키기 위해서인데 모습을 감추고 살아간다면 외국에 있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주장이었다. 이는 지금이나 그때나 대단한 용기였고 곧 탈레반 지지자들의 표적이 되어 수많은 비난을 받았다.

 

조흐레 에스마엘리(Zohre Esmaeli)


– 1985년 7월 1일 출생

– 아프가니스탄계 독일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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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7월 1일 카불 출생으로 친어머니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었다. 두 살 때 친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조흐레는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에게 길러졌다.

 

그녀의 나이 열세 살 때 부모님은 전재산을 다 팔고 탈레반 정권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이 망명길은 이란-카자흐스탄-러시아-우크라이나-체코를 거치는 10,000km의 여정이었고 독일에 도착하는데 무려 6개월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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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의 삶도 쉽지 않아서 학교에서는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고, 기껏 아프간을 탈출해놓고 아버지와 오빠들은 그녀가 아프간 전통에 따라 집에서 정해주는 남편감과 결혼해 살기를 원했다. 결국 그녀는 열일곱 살에 이번에는 가족으로부터 탈출했다.

 

조흐레가 탈출을 감행한 것에는 모델에 대한 꿈도 있었다.

 

열여섯 살 때 쇼핑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사진작가로부터 혹시 모델 사진을 찍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고,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아마추어 모델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가족에게 발각되면서 금지되었는데 탈출 후 1년 만에 모델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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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타고난 재능으로 수많은 광고와 패션잡지에 등장했고 어느덧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유일한 국제 톱모델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아버지에게도 1년 만에 전화를 걸어 재회했고 만나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며 화해했다고 한다.

 

수많은 무슬림 가족들이 기껏 자유국가로 탈출을 해놓고도 자유를 누리지 않고 심지어 딸을 잃는 길을 택하기도 하는 것에 비하면 먼길을 돌아왔지만 그녀는 행운아인 셈이었다.

 

수산 피루즈(Soosan Firooz)


– 1989년생

– 아프가니스탄 배우 겸 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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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1990년대 내전을 피해 7년간 이란의 난민촌에서 망명생활을 했고 그 후 3년간의 파키스탄 난민촌 생활을 합치면 도합 10년을 난민촌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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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정권이 물러나고 아프가니스탄에 돌아온 그녀는 칸다하르에서 카펫을 짜는 일을 하다가 2011년 대도시인 카불로 이주하였고, 우연히 TV와 영화의 엑스트라를 맡으면서 연예인의 꿈을 꾸게 되었다.

 

이후 랩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아버지가 깨인 사람인지 래퍼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이로써 2012년 싱글을 발매하며 아프가니스탄 첫 여성 래퍼가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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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도 카불에 가족들과 살고 있는데 특히나 사회비판을 하는 래퍼인지라 염산 공격, 납치, 살해 등의 위협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수산의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매니저와 경호원 역할을 하며 딸을 지키는 중이다.

 

하지만 삼촌은 극단주의 무슬림인지 그녀가 TV에 나오고 랩을 하는 것을 싫어해서 가족과 인연을 끊는 등 가까운 친인척조차도 이런 문제로 갈라질 수 있는 사회가 아프가니스탄이다.

 

소니아 나세리 콜(Sonia Nassery Cole)


– 1965년생

– 아프가니스탄계 미국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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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카불 출생으로 외교관의 딸이었으나 1979년 소련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17세 때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소련의 침공은 불의’라는 내용의 도움 요청 편지를 썼는데 이에 감동을 크게 받은 레이건이 그녀를 백악관으로 초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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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의 소니아와 레이건


이후 백악관의 지원으로 인권운동을 시작하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통해 아프간의 현실을 외부로 알렸다. 2010년 그녀가 감독한 ‘블랙 튤립(The Black Tulip)’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에 출품되기도 하였으며 보스턴 영화제, 살렌토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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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I Am You’


이후 2019년에 제작된 영화 ‘I Am You’ 역시 세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이야기를 다루는 등, 조국 동포들의 생존의지와 힘든 삶을 다룬 작품을 만들고 있다.

 

리나 알람(Leena Alam)


– 1978년생

– 아프가니스탄계 미국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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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 출생으로 1989년 내전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1998년부터 연기활동을 시작했다.

 

난민들의 현실과 여성인권과 관련된 영화에 주로 출연했으며 2016년 서울국제드라마어워즈에서는 TV드라마 ‘쉐린’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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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르훈다 사건 항의시위


2015년 3월 19일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27세 여성 파르훈다가 코란을 불태웠다는 누명을 쓰고 대낮 거리에서 대중들에게 구타당해 사망한 끔찍한 사건(관련 글)이 발생했는데, 이때 카불에서 인권운동가들과 사건 상황을 재연하는 시위를 펼쳤다. 당시 파르훈다 역을 맡은 여인이 리나 알람이었다.

 

애넷 마헨드루(Annet Mahendru)


– 1985년 11월 5일생

– 아프가니스탄 출신 미국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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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출신의 기자였던 부친이 아프가니스탄에 왔을 때 모친(러시아인)을 만나 카불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직장 때문에 러시아와 독일등을 오가며 살다가 13세에 뉴욕으로 이주했으며 뉴욕대학교 중퇴 후 연기에 올인했다. 부모의 인종적 배경과 환경 덕분에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에 능통하며 힌디어와 프랑스어, 페르시아어도 구사하는 언어의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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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의 연기 경력 동안 40편 이상의 영화와 TV드라마에 출연한 성공한 배우이다. 2014년 비평가협회(Critics’ Choice Television Award) TV드라마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2020년에는 AMC의 간판 드라마 워킹데드(The Walking Dead) 시즌 10 World Beyond에 제니퍼 “헉” 말릭(Jennifer “Huck” Mallick) 역으로 출연했다.

 

사실 카불 출생이라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 여배우로 인식되어 있지만 혈통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전혀 상관이 없다. 각종 인터뷰에서도 러시아와 인도에 대한 생각과 애정은 언급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마리나 골바하리(Marina Golbahari)


– 1989년생

– 아프가니스탄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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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수도 카불의 길거리에서 아마추어 배우를 찾고 있던 영화감독 세디그 바르막(Siddiq Barmak)을 절박하게 붙잡고 구걸하던 한 거지소녀가 있었다. 감독은 ‘소녀의 눈빛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그 자리에서 배우로 캐스팅했다.

 

바로 그 소녀가 영화 ‘오사마(Osama, 2003)’의 주연배우 마리나 골바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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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사마’의 마리나 골바하리


이 작품은 모든 영화와 음악을 금지시킨 탈레반 정권이 축출된 이후 처음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제작된 영화였기에 큰 주목을 받았고 세계 각국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호평을 받았다.

 

마리나의 정확한 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고 1989년생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이는 가족들조차 그녀의 생일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불우한 유년기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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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사마’ | 한국판 ‘천상의 소녀’


영화의 내용은 전쟁으로 남자 가족이 모두 사망한 한 가정을 다루고 있는데, 탈레반이 여자들이 일하는 것을 금지하자 오사마라는 소녀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소년으로 위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결국 발각되어 오사마는 재판에 회부되고 결국 나이 많은 남자의 네 번째 부인이 된다. 원래 결말은 오사마가 자유를 찾는 것이었으나 세디그 감독이 ‘아프간의 진짜 현실과 다르다’며 암울한 내용으로 수정하면서 처절한 현실을 담은 수작이 되었다.

 

‘천상의 소녀’라는 제목으로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되어 ‘PSB 영화상(관객상)’을 받으며 마리나는 주연배우로 한국을 방문하였고, 이후 12년 만인 2015년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초청되어 송강호와 함께 공동 사회자로 활약했다. 당시 송강호는 “어린 소녀가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배우로 성장했다”며 감격해하기도.

 

과거 수십 년간 전쟁에 휘말린 아프가니스탄이기에 이 나라의 인물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대부분 테러리스트나 저항군, 일부 정치인이 연상된다. 65
▲ 2003년 첫 방한 당시 | 2015년 사회자로 초청 당시


당시 탈레반은 사라졌어도 여전히 여성인권이 최악의 수준이었던 아프간 출신의 여배우가 국제영화제의 사회자가 된 것은 대단한 상징성을 가진 사건이었다. 하지만 마리나의 머리카락이 노출된 사진이 전 세계에 퍼지자 자국 무슬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살해위협이 쏟아졌고, 결국 그녀는 현재 프랑스에서 남편과 함께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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