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2월 30일, 금강산 화재

북한 지역에 있기 때문에 직접 가본 사람은 별로 없어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흔히 쓰고 있는 속담일 정도로 민족의 명산인 금강산(金剛山).

 

1930년대가 끝나가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하기 직전인 1939년 12월 30일 새벽 3시, 당시 조선에 얼마 있지도 않았던 관광자원인 금강산 외금강 일대에 산불이 발생했다.

 

최초 외금강 관음연봉(觀音連峰)의 골짜기에서 발생한 불길은 온정리(溫井里)의 앞뒤를 에워싸며 크게 치솟았다.

 

1930년대가 끝나가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하기 직전인 1939년 12월 30일 새벽 3시, 당시 조선에 얼마 있지도 않았던 관광자원인 금강산 외금강 일대에 산불이 발생했다. 1
▲ 산불 발생지점 지도


각 언론사는 급하게 호외를 발행했고, 조선일보 홍종인(洪鍾仁, 1903~1998) 기자는 12월 31일 오전 11시 25분, 경성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고 금강산 상공을 선회하며 취재를 했다.

 

비행기에서 본 산불은 외금강 집선봉(集仙峰) 일대가 가장 불길이 강하게 일고 있었으며, 다른 곳도 조금 덜할 뿐 연기가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적고 있다.

 

1930년대가 끝나가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하기 직전인 1939년 12월 30일 새벽 3시, 당시 조선에 얼마 있지도 않았던 관광자원인 금강산 외금강 일대에 산불이 발생했다. 3
▲ 상공에서 본 금강산 산불. 비행기 기체로 추정되는 부분과 함께 흐릿한 산의 형상이 보인다. 【조선일보 1939.12.31】

 

산불과 폭설이 겹친 재난


이 산불로 인해 근방의 1천여 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지금은 사라진 외금강역 역사(일제시대 외금강역 모습)로 긴급 대피하는 재난이었다.

 

진화가 다 끝난 다음 보고된 인명피해는 고성군 서면에서 사망 4명과 실종 5명, 양양군 토성면에서 사망 2명과 부상 2명이 발생하였다.

 

1930년대가 끝나가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하기 직전인 1939년 12월 30일 새벽 3시, 당시 조선에 얼마 있지도 않았던 관광자원인 금강산 외금강 일대에 산불이 발생했다. 5
▲ 화재현장으로 달려가는 경방단(소방단) 【조선일보 1940.01.02】


또한 이 산불로 통일신라 때 지어진 신계사(神溪寺)의 말사(末寺)인 보광암(普光庵)에 불길이 덮쳐 사찰이 전소되었다.

 

당시 경찰로 근무했던 최기남(崔基南, 1875~1946)의 별장이 이 근방에 있었는데, 집안에 있던 희귀한 불경고서 200여 권이 모두 타버리는 등 문화재 손실도 컸다.

 

1930년대가 끝나가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하기 직전인 1939년 12월 30일 새벽 3시, 당시 조선에 얼마 있지도 않았던 관광자원인 금강산 외금강 일대에 산불이 발생했다. 7
▲ 보광암의 모습 (금강산 사진첩, 덕진사진관 1922)


산불이 꺼지기 무섭게 1월 3일 오전부터는 폭설이 내리기 시작해 언제 불이 나기라도 했냐는 듯이 불탄 자취를 완전히 감추어버렸다.

 

눈 덕분에 불은 확실하게 꺼졌지만 집과 가구를 잃은 이재민 400여 명이 엄동설한에 내몰리자 강원도에서는 특별회계를 지출하여 긴급구제를 결정하고 국고보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가 끝나가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하기 직전인 1939년 12월 30일 새벽 3시, 당시 조선에 얼마 있지도 않았던 관광자원인 금강산 외금강 일대에 산불이 발생했다. 9
▲ 폭설이 내린 화재현장 【동아일보 1940.01.08】


화재가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난 1월 8일 현지 철도국원들의 보고에 따르면, 산불로 인한 피해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경치가 좋은 명승 지역은 생각보다 큰 손실이 없고 외금강 스키장도 아무런 피해가 없다고 전했다. 당시 금강산 관광이 주된 수익이던 철도국이었던지라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특히 ‘산길을 가로막았던 잡목들이 타서 오히려 관광이 용이하게 되었다’는 금강산협회 간사의 발언도 보도되었는데, 만약 지금이라면 인명피해와 이재민이 발생한 상황에서 해서는 안 되는 망언으로 큰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1930년대가 끝나가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하기 직전인 1939년 12월 30일 새벽 3시, 당시 조선에 얼마 있지도 않았던 관광자원인 금강산 외금강 일대에 산불이 발생했다. 11
▲ 화재현장의 금강산. 왼쪽에 오만물상(奧萬物相) 팻말이 보인다. 【조선일보 1940.01.02】

 

산불의 원인과 53불(佛) 신앙


산불의 원인은 도굴단들 때문이었다. 여기서 도굴단은 무덤이나 유적의 문화재를 훔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불법으로 광물을 채취하는 자’들을 말한다.

 

당시 금강산에는 중석(重石, 텅스텐)과 수연(水鉛, 몰리브데넘)이 광범위하게 채취되고 있었는데, 화재가 발생한 지역에서 큰 중석광이 발견되었기에 금강산 산중에는 엄청난 숫자의 도굴단들이 산재하고 있었다.

 

1930년대가 끝나가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하기 직전인 1939년 12월 30일 새벽 3시, 당시 조선에 얼마 있지도 않았던 관광자원인 금강산 외금강 일대에 산불이 발생했다. 13
▲ 도굴한 중석을 선광(選鑛)하는 모습


금강산 산불은 도굴을 하던 일당이 움막에서 밥을 짓다가 강풍에 불길이 마른 가지로 옮겨 붙는 바람에 대형화재로 이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강원도 경찰은 그동안은 산세가 워낙 험해 수색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 산불을 계기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역까지 들어가 각 도굴단 우두머리 18명과 조직원 600여 명을 잡아들였으며, 검거 즉시 그들이 거주하는 움막도 모두 철거하는 강력한 정책을 펼쳤다.

 

1930년대가 끝나가고 새로운 10년을 맞이하기 직전인 1939년 12월 30일 새벽 3시, 당시 조선에 얼마 있지도 않았던 관광자원인 금강산 외금강 일대에 산불이 발생했다. 15
▲ 도굴로 인해 파괴된 상팔담(上八潭)부근. 선녀와 나무꾼의 배경이 된 곳으로 파헤쳐지고 흙탕물이 되었다.


1939년 이전까지 역사적으로 금강산에 발생한 화재는 49회로 이 산불이 50번째였다.

 

당시 금강산을 중심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오십삼불(五十三佛)신앙이 유행하였는데, 이 신앙에 빗대어 ‘금강산에 53번의 산불이 일어나면 더 이상 불이 나지 않는다’는 전설이 떠돌고 있었다.

 

이후 화재가 발생한 기록은 있으나 1950년대 이후 북한 관리하에 있는 곳이라 정확한 횟수는 파악되지 않아서 전설이 적중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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