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사진의 뒷이야기 ㊵ 윤보선 대통령의 첫번째 부인

아래의 사진은 해위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이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확정된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해 1960년 8월 14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사저에 모인 해평 윤씨 자손들의 모습이다.

 

아래의 사진은 해위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이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확정된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해 1960년 8월 14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사저에 모인 해평 윤씨 자손들의 모습이다. 1


사실 친인척이 아니라면 정면의 윤보선 대통령과 영부인 공덕귀(孔德貴, 1911~1997)여사 외에는 알아보기 힘든 사진이지만, 1995년 조선일보의 ‘한국의 명문가’ 시리즈에서 다시 한번 자료사진으로 등장하며 구성원의 이름도 함께 소개되었다.

 

아래의 사진은 해위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이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확정된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해 1960년 8월 14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사저에 모인 해평 윤씨 자손들의 모습이다. 3


이날 대략 7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윤보선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인 장녀 윤완구(尹琓求, 1915~2007)와 차녀 윤완희(尹完姬, 1918~2020)의 이름이 빠져있다.

 

이들이 전처의 자식들이라고 해서 보통의 잔치도 아니고 친부의 대통령 축하 기념회에 참석하지 않았을지는 의문이다. 사진에는 장녀 윤완구의 딸 남혜경(24번)도 참석하고 있는데, 딸이 어머니 없이 홀로 참석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사진은 해위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이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확정된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해 1960년 8월 14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사저에 모인 해평 윤씨 자손들의 모습이다. 5


아마도 두 딸들은 번호가 매겨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 있지 않을까.

 

사진은 공덕귀 여사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었을 것이고, 촬영 후 35년이 흐른 시점에서 이복형제들의 얼굴을 알아보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그나마 소장자와 비슷한 세대였을 남혜경의 얼굴과 한글이름 정도만 기억해낸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의 사진은 해위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이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확정된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해 1960년 8월 14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사저에 모인 해평 윤씨 자손들의 모습이다. 7
▲ 어린 시절의 윤완구(앞줄 맨 오른쪽), 윤완희(그 옆)


다만 장녀 윤완구와 달리 차녀 윤완희와 가족들은 기념회에 참석하지 않았을 확률도 높다. 그녀는 독립운동가 신규식(申圭植, 1880~1922)의 아들 신준호(申俊浩)와 결혼 후 안국동 가옥에서 부친과 함께 거주했는데, 신준호는 장인 윤보선과 정치적 견해차이로 사이가 악화되어 분가하게 된다.

 

이후 신준호는 6.25전쟁 중 인민군에 부역하면서 휴전 후 사형을 언도받기에 이르는데(무기로 감형 후 10년 복역), 이는 윤보선의 처지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윤완희 부부와 해평 윤씨 일가의 관계는 크게 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이 촬영된 시기 신준호는 부역죄로 복역 중이었기에 윤완희가 이곳에 등장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윤보선의 첫 번째 아내


윤완구, 윤완희의 어머니이자 윤보선의 첫 번째 부인은 대한제국 군부대신을 지낸 민영철(閔泳喆)의 딸 민경숙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소학교를 다니고 산둥성 옌타이에서 프랑스 사람이 운영하던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조선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학력을 가진 경우였다.

 

아래의 사진은 해위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이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확정된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해 1960년 8월 14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사저에 모인 해평 윤씨 자손들의 모습이다. 9
▲ 윤보선의 첫번째 부인 민경숙


몇몇 자료에는 윤보선의 유학길에 동행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지만, 민경숙 본인의 말에 따르면 1927년까지 12년간 독수공방 하였고, 그 이후로도 윤보선이 유학을 마치고 올 때까지 홀로 조선에서 딸들을 길렀다(총 15년).

 

기록이 상충하고 있지만 당시의 시대상으로 볼 때, 어머니가 어린 딸들을 두고 해외에 장기체류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민경숙의 증언에 무게가 실린다.

 

아래의 사진은 해위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이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확정된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해 1960년 8월 14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사저에 모인 해평 윤씨 자손들의 모습이다. 11
▲ 1917년, 윤치소 가족사진.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윤보선이고 민경숙은 한걸음 떨어져있다.


그런데 윤보선이 오랜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이후 민경숙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게 되는데, 문제의 사건은 사촌 윤치호(尹致昊, 1865~1945)의 영문일기에 기록된 불륜설이다.

 

– 윤치호 일기(1932년 9월 29일)

29th. Thursday. Beautiful.

 

Seoul home.

Cousin No. 2 told me this afternoon that his elder daughter-in-law, 潽善’s wife had to be sent home on account of a deed of sexual infidelity. Of course I said nothing but one couldn’t help wish that he(cousin) especially his wife had kept the matter a dead secret.

For what do they gain by exposing the matter? Cousin’s wife satisfy, thereby the proverbial spite of a proverbial Si-Omani(husband’s mother) and Posun gets the freedom of marrying another girl. That’s all.

But burying the secret would have saved a young woman from a life of shame, a young man from a disgrace; two little girls from the misfortune of being separated from their mother; and cousin No. 1’s eldest daughter from embarassment and suffering in the home and family of Min 瑛植.


이 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오로지 윤치호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윤보선 쪽의 입장만이 나열되어 있고, 윤보선은 귀국 이전부터 이미 아내와 이혼을 하고 싶어했다는 내용이 윤치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사진은 해위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이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확정된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해 1960년 8월 14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사저에 모인 해평 윤씨 자손들의 모습이다. 13
▲ 1930년대 윤치소 가족사진. 가운데 줄 오른쪽 끝이 윤보선-민경숙 부부


어쨌든 윤보선의 귀국 직후부터 부부는 불화에 휩싸인 끝에 결국 별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민경숙이 1937년에 사망하며 자연스럽게 관계가 정리되었고 12년 후인 1949년 1월 6일, 윤보선은 서울시장으로 재직 중 ‘독신생활 20년 끝에 윤시장 결혼식 거행(한성일보 1949년 1월 7일)’이라는 보도와 함께 공덕귀와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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