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구한말 한성의 물장수

아래의 사진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대에 수도 한성(서울)의 거리에서 조선인 물꾼(물장수)이 물동이를 지고 있는 모습을 미국인 목사 윌리엄 아서 노블(William Arthur Noble, 1866~1945)이 촬영한 것이다.

 

아래의 사진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대에 수도 한성(서울)의 거리에서 조선인 물꾼(물장수)이 물동이를 지고 있는 모습을 미국인 목사 윌리엄 아서 노블(William Arthur Noble, 1866~1945)이 촬영한 것이다. 1


이 시기는 수도가 보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한성부민들은 한강물을 길어다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다. 즉 생존에 필수적인 물을 힘들게 떠다 주는 사람들은 낮은 신분의 위치에 있었으나 실제 세도만큼은 누구보다 당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자신들의 이권을 극대화하기 위해 각 동네별로 물꾼 조합이 형성되었으며, 수요량이 많은 동네의 물꾼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곳보다 큰 값을 치러야 하기도 했다.

 

물 수요가 비교적 적은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창선방좌(昌善坊座)에 있던 물꾼이 도심에 위치한 수진방좌(寿進坊座)로 옮기는 행운을 얻기라도 하면 그는 새로운 동료들에게 한 달간 벌어들인 물삯으로 잔치를 벌였을 만큼 영예로운 일이었고, 물을 떠다 줄 권한이 있는 주권(株権)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산으로 인정될 정도였다.

 

아래의 사진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대에 수도 한성(서울)의 거리에서 조선인 물꾼(물장수)이 물동이를 지고 있는 모습을 미국인 목사 윌리엄 아서 노블(William Arthur Noble, 1866~1945)이 촬영한 것이다. 3
▲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한 이용익(李容翊)의 흉상. 그는 물꾼들의 달리기 대회인 ‘경각희(競脚戱)’에서 우승한 유명한 물꾼이었다.


한성에 수도가 생긴 이후에도 물꾼조합의 세력은 다소 약화되긴 했어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이 시기 물꾼들은 분열되기 시작했는데, 강에서 물을 떠 오는 ‘강물꾼‘들과 수돗물을 받아 나르는 ‘수돗물꾼‘이 대립했다.

 

신식 수돗물꾼들은 종전의 나무물통을 가벼운 석유깡통으로 대체하였으며, 주로 물을 실어 나르는 곳도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촌락이나 부유층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특히 이 시기 콜레라가 번지면서 당국에서 강물이나 샘물을 긷는 것을 금지하고 수돗물만을 긷도록 하자 수돗물꾼의 임금은 강물꾼의 5배 이상으로 치솟았다.

 

아래의 사진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대에 수도 한성(서울)의 거리에서 조선인 물꾼(물장수)이 물동이를 지고 있는 모습을 미국인 목사 윌리엄 아서 노블(William Arthur Noble, 1866~1945)이 촬영한 것이다. 5
▲ 컬러 변환한 사진 속의 물꾼은 통의 재질이 나무로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강에서 물을 긷는 구식 물꾼의 모습이다.

 

이에 분노한 강물꾼들은 배달을 하고 있는 수돗물꾼들을 습격해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깡통을 짓밟아 버리는 사건이 잇따랐다.

 

하지만 강물꾼들은 표면적으로는 ‘왜놈들에게 물을 길어다 주는 반역자를 규탄하자‘는 명분을 외쳤고, 이에 시민들도 남의 눈치가 무서워 수돗물꾼의 물을 기피하면서 강물꾼들의 임금이 잠깐이나마 다소 회복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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