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투자의 신’ 반복창의 얼굴과 칭송 기사

‘미두왕’ 반복창


반복창
(潘福昌)은 일제시대 곡물을 대상으로 현물 및 선물(先物) 거래를 하던 ‘미두장(米豆場)’에서 1년 만에 사상초유의 부자가 된 인물이다.

 

엄청난 재력을 과시하며 당시 조선 최고의 미인 중 한 명으로 여겨졌던 김후동과 조선호텔에서 호화결혼식을 올린 자료는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며, 이런 반복창에 대한 이야기는 방송에서도 여러 번 다루어질 정도.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투자가 연거푸 실패하며 그 많던 재산이 벌어들일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불운도 겪었다. 그래서 반복창은 성공과 실패의 양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인물로 거론되기도 한다. 아래는 반복창이 한창 성공을 거둘 당시에 그를 끝없이 칭송하는 기사이다.

 

– 미두취인소에 일기재(一奇才)
– 당년 26세의 훌륭한 조선 청년

 

인천 미두취인소 시장에는 그 등락을 전제하고 강약의 인기를 좌우한다는 무명의 일개 남자가 있다. 그 이름은 ‘반차랑(潘次郎)’이라하고 연령은 지금 겨우 26세의 청년이다.

 

엄청난 재력을 과시하며 당시 조선 최고의 미인 중 한 명으로 여겨졌던 김후동과 조선호텔에서 호화결혼식을 올린 자료는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며, 이런 반복창에 대한 이야기는 방송에서도 여러 번 다루어질 정도. 1
▲ 주식 시세판을 연상시키는 미두취인소 내부


선천적으로 총명한 두뇌와 담력을 가지고 정기계(定期界)에서 분마(奔馬)의 형세를 보이며 시장의 한 위재(偉才)로 두려워할 만한 미래를 미리 보는 이 청년의 성질은 강직하여 지금 인천 미두취인시장에서 ‘부(富)’의 권위에 대항하여 거부의 자산을 가진 다수인에 대항하여 양양자득(揚揚自得)으로 활동하는 바이다.

 

그 몸은 한 서생에 불과하나 신용을 가지고 공권으로 운용하는바 ‘정기계의 기린아’라고도 칭함으로 그 장래에는 어떠한 운기가 돌아올 것은 가히 헤아리기가 어려운 바인데, 쾌남아 차랑에 대하여 중대시하는 세상 사람은 반드시 미래에 큰 행복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리라.

 

그 청년의 이름을 ‘차랑’이라고 부르나 본명은 ‘반복창(潘福昌)’이라 하는데, 강화도 어느 관리의 집에 출생하여 어려서 일찍이 부친을 잃고 모친의 사랑으로 생명을 부지하면서 동서로 표박하다가 12년 전에 인천으로 온 것인데, 정기계의 아라키(荒木) 상점에 고용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이었다.

 

당시에 겨우 받는 월급은 3원이었는데 그중에서 백금(대부분의 금액이라는 뜻)을 저축한 그 청년은 일심으로 시세를 보았다. 그러나 가련하게도 일조(一朝)에 그 그림자는 사라져 버리고 이 청년은 단지 평소와 같이 되었다. 그런데 왕년에 아라키가 미두를 매점하였는데, 이 청년은 주인의 방침에 반대하며 단정코 팔아버렸는데 놀랍게도 시세가 폭락에 또 폭락을 하였다.

 

엄청난 재력을 과시하며 당시 조선 최고의 미인 중 한 명으로 여겨졌던 김후동과 조선호텔에서 호화결혼식을 올린 자료는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며, 이런 반복창에 대한 이야기는 방송에서도 여러 번 다루어질 정도. 3
▲ 반복창의 흐릿하게 남아있는 사진 【매일신보 1921.01.16】


그리고 이 청년은 자기 모친에 대하여 효성이 적지 아니한바 세상 사람으로는 누구든지 미칠 사람이 없는바로 ‘효자 차랑’이라는 이름은 ‘정기계의 기린아’란 명성과 같이 이 세상에서 널리 부르게 되었다.
사상이 견고한 것으로 보더라도 현대 청년의 모범할만한 귀감이 될지며 그의 쾌(快)함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다른 사람으로는 모방할 수 없는 바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 될 것이다.

 

현재 중정(仲町, 현재의 인천 중구 관동)에서 거주하는 그 청년의 집에는 내선인 열명을 손님 대접하되 자기 몸보다 더욱 어여삐 생각하는 바인데, 이것이 26세의 조선인 청년으로 참으로 진기한 일이다.


현대에도 혜성같이 등장한 젊은 주식부자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훌륭한 청년으로 포장하는 기사를 가끔 볼 수 있는데, 위 기사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런 류의 기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느낌이다.

 

반복창이라는 본명보다 반지로(반차랑)로 유명했던 그의 재산은 이 시기에 정점에 달했고, 사회 각처에 기부를 하는 등 투기꾼이 아닌 자산가이자 사회사업가의 이미지를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몇 달 후(1921년 5월 28일) 김후동과의 결혼을 앞둔 만큼 어쩌면 기자에게 ‘미화된 이미지’로 청탁을 한 기사일지도 모르겠다.

 

엄청난 재력을 과시하며 당시 조선 최고의 미인 중 한 명으로 여겨졌던 김후동과 조선호텔에서 호화결혼식을 올린 자료는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며, 이런 반복창에 대한 이야기는 방송에서도 여러 번 다루어질 정도. 5
▲ ‘원동 큰 재킷’ 김후동과 자녀들 【동아일보 1926.01.22】

 

반복창의 진짜 나이


그런데 현재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자료에서 반복창은 불과 21세의 나이(1900년생)에 거부가 된 것으로 다루고 있다. 아마도 1939년의 조선일보 사설을 인용하면서 비롯된 오류로 보인다.

 

엄청난 재력을 과시하며 당시 조선 최고의 미인 중 한 명으로 여겨졌던 김후동과 조선호텔에서 호화결혼식을 올린 자료는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며, 이런 반복창에 대한 이야기는 방송에서도 여러 번 다루어질 정도. 7
▲ 반복창을 ‘대정 9년(1920년) 20세의 홍안’이라고 소개하는 부분 【조선일보 1939.05.14】


1921년의 매일신보의 기사에서는 반복창은 이미 26세라고 되어 있고, 그렇다면 출생연도는 1895년 즈음이다. 1939년 시점의 기사보다는 한창 활동하는 시기의 기사가 더 정확하지 않을까.

 

또 전 조선을 ‘일확천금 붐’으로 떠들썩하게 만들다가 2년 만에 빈털터리가 된 반복창은 1923년 5월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면서 나이가 등장하는데, 이때의 나이는 29세로 보도되고 있다.

 

엄청난 재력을 과시하며 당시 조선 최고의 미인 중 한 명으로 여겨졌던 김후동과 조선호텔에서 호화결혼식을 올린 자료는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며, 이런 반복창에 대한 이야기는 방송에서도 여러 번 다루어질 정도. 9
▲ 1923년의 체포기사에서는 29세, 재판기사에서는 31세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 사건으로 인해 반복창은 재판 끝에 그해 10월, 징역 1년을 구형받았는데 이때는 31세로 보도되었다(위). 같은 년도임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다르게 보도된 것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한국 나이와 만 나이가 혼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복창은 이듬해인 1924년 영친왕(의민 태자)의 결혼식 은사령이 발효되면서 징역을 7개월 반으로 감형받았다.

 

기자 개인의 생각으로 작성된 1939년 조선일보의 자료보다는, 경찰서와 법원 등 기관을 통해 드러난 나이들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즉 반복창의 진짜 나이는 1900년생이 아닌 1893~1895년생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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