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장수 호텔, 조선호텔 터의 변천사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106(소공동 87-1번지)에 위치한 ‘웨스틴 조선호텔 서울‘의 최초 명칭은 조선경성철도호텔(약칭 조선호텔)로 1914년 10월 10일 개업하였다.

 

당시에도 붉은색 벽돌의 사치스러운 서양식 건물이었으나 노후화된 건물을 철거하고 1970년에 새로 건립했으며, 1981년에는 이름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게 된다.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106(소공동 87-1번지)에 위치한 '웨스틴 조선호텔 서울'의 최초 명칭은 조선경성철도호텔(약칭 조선호텔)로 1914년 10월 10일 개업하였다. 1
▲ 건립초기 조선호텔 전경


그렇다면 1914년 이전의 터는 어떤 곳이었을까.

 

부마궁에서 적국의 사령부, 중국 사신의 숙소로


원래 이곳은 조선 태종(이방원, 1367~1422)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의 궁인 소공주댁(小公主宅)이 있었다. 그래서 이 일대는 ‘소공주골’이라 불렸으며, 현재 행정구역 명칭의 유래도 소공주동(小公主洞)에서 기원한 것으로 줄여서 ‘공동’ 혹은 ‘소공동’이 되었다.

 

이후 태종은 경정공주가 명나라로 시집가는 것을 막기 위해 1403년 조대림(趙大臨, 1387~1430)과 결혼시켰고, 소공주댁은 공주부부가 살던 부마궁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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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의 경정공주 묘 ⓒ두산백과사전 | 양주의 조대림 묘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조(1552~1608) 때에 이르러서는 그의 셋째 아들 의안군(義安君, 1577년~1588)의 궁으로 하사되어 남별궁(南別宮)으로 칭해졌다.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한양까지 진격한 일본군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573~1655)가 남별궁에 일 년 가까이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기거하였고, 이듬해에 일본군이 퇴각한 뒤에는 원군으로 온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이 4월 20일경부터 남별궁을 차지해 오래 머물렀다.

 

전쟁으로 한양이 쑥대밭이 되어버린 상황이었으나 신기하게도 이곳만은 멀쩡하게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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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키타 히데이에(좌), 이여송(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중국의 칙사(勅使)들이 방문했을 때 묵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숙박‘이라는 목적을 따지면 400여 년 전부터 현재까지 같은 역할을 해오고 있는 셈이다.

 

당시 중국 사신이 한반도에 도착하면 모화관(慕華館)에서 영접한 다음, 서대문(돈의문)과 서소문(소의문)을 돌아 남대문(숭례문)으로 들어와 태평관(太平館)에서 잔치를 하고 남별궁에 숙소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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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화관은 갑오경장 이후 독립관으로 사용되다가 철거되었고 1997년 복원되었다. ⓒKBS WORLD Radio

 

정조(1752~1800) 집권기에는 사신을 접대하는 관서인 예빈시(禮賓寺)를 이곳에 두었고, 정문을 홍전문(紅箭門)으로 설치해 상당한 격식과 예를 갖추었다. 당시 예빈시 안에 있던 명설루(明雪樓)의 후원에는 작은 정자와 돌로 만든 거북이 있었는데 이 돌거북이 매우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서 부녀자들이 기도를 하기 위해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환구단과 조선호텔


갑오년(1894년) 이후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하면서 고종이 정유년(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예식을 거행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환구단(圜丘壇, 원구단)이라고 불리는 제천단(祭天壇)을 이곳에 쌓고, 황금색 원추형의 지붕 아래에서 고종이 자신을 황제로 칭하고 대황제(大皇帝)의 즉위식을 거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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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환구단의 모습. 왼쪽의 기와집이 현존하는 황궁우이다.


오늘날에는 당시의 대한제국 선포에 대해 ‘시대착오적인 퇴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지만, 이 터에서 거행된 예식이 대부분 능욕의 흑역사인 것을 감안하면 어쨌든 수백 년 만에 유일하게 당당한 예식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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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구단 미니어처 ⓒ서울역사박물관


하지만 대한제국 선포 예식이 거행된 지 불과 13년이 흐른 후에 조선 산하는 빛을 잃었고, 1913년에는 환구단을 철거하고 조선호텔 건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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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의 조선호텔


양식당과 커피숍을 갖추고 외제 인테리어로 내부를 화려하게 치장했던 조선호텔은 일제시대에 왕족과 부유층은 물론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의 만남과 사교의 장이었으며, 미두취인소나 금광으로 큰돈을 번 사람들이 과시를 위해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리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 관련 글: 조선호텔에서 결혼한 ‘미두왕’ 반복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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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조선호텔과 황궁우(皇穹宇)가 함께 촬영된 모습


해방 후 미군정 시기(1945~1948)에는 군정청 사령부가 설치되었으며, 귀국한 이승만 박사가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당시 이승만 박사가 호텔 외벽에 붙어있던 ‘Chosen’이라는 일본식 영문표기를 ‘Chosun’으로 바꿀 것을 조언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625 전쟁 중에는 북한군에게 서울이 3일 만에 점령당하면서 조선호텔도 그들의 수중에 넘어가 로비에 김일성과 모택동의 초상화가 걸리기도 했다. 서울이 수복되고 휴전이 된 이후에는 미군의 숙소와 휴양지로 사용되었고 1954년에 방한했던 할리우드 슈퍼스타 마릴린 먼로가 머문 곳도 조선호텔이었다.

 

• 관련 글: 마릴린 먼로의 한국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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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웨스틴조선호텔 서울’ 건물과 환구단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황궁우(皇穹宇)’


이처럼 조선호텔과 그 주변의 터는 한국 근대뿐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이어지는 오욕과 변화의 순간을 모두 담고 있는 사적이며, 호텔 그 자체만으로도 현재 남아있는 한국의 호텔 중 가장 오래된 호텔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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