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최후의 공개처형, 오이겐 바이트만(Eugen Weidmann)

프랑스의 마지막 공개처형은 단두대(斷頭臺, 기요틴)를 이용한 것으로, 사형수는 독일 출신의 범죄자 오이겐 바이트만(Eugen Weidmann, 1908~1939)이었다.


여섯 건의 살인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은 오이겐 바이트만은 1939년 6월 17일, 베르사유 감옥 앞의 생피에르 거리에서 단두대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프랑스의 마지막 공개처형은 단두대(斷頭臺, 기요틴)를 이용한 것으로, 사형수는 독일 출신의 범죄자 오이겐 바이트만(Eugen Weidmann, 1908~1939)이었다. 1
▲ 크리스토퍼 리(Christopher Lee, 1922~2015)


한편, 영화 반지의 제왕(2003)에서 마법사 사루만 역으로 열연한 배우 크리스토퍼 리(Christopher Lee)는 이 공개처형을 직접 목격했다고 자서전에서 전한 바 있다. 당시 나이 17세.

 

체포와 재판, 사형집행 과정


프랑스의 마지막 공개처형은 단두대(斷頭臺, 기요틴)를 이용한 것으로, 사형수는 독일 출신의 범죄자 오이겐 바이트만(Eugen Weidmann, 1908~1939)이었다. 3
▲ 범죄자 오이겐 바이트만(Eugen Weidmann)

 

프랑스의 마지막 공개처형은 단두대(斷頭臺, 기요틴)를 이용한 것으로, 사형수는 독일 출신의 범죄자 오이겐 바이트만(Eugen Weidmann, 1908~1939)이었다. 5
▲ 오이겐 바이트만의 평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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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범 로저 밀리옹(Roger Million). 재판 결과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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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저 밀리옹의 애인 콜레트 트리코(Colett Trico). 최초 20개월 형을 받았다가 최종 무죄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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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희생자 장 드 코번(Jean de Koven). 미국인 여행객으로, 살해 후 현금 300프랑과 여행자 수표 430달러를 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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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드 코번의 다른 사진. 그녀는 교살당한 후 정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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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희생자 조제프 쿠피(Joseph Couffy). 운전수로 고용되었다가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다. 현금 2500프랑도 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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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에 발견된 조제프 쿠피의 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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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희생자 재닌 켈러(Jeannine Keller). 직업은 간호사로 살해 후 현금 1400프랑과 다이아몬드 반지를 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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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번째 희생자 로저 르블롱(Roger Leblond). 연극 프로듀서. 살해 후 5,000프랑 강탈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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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번째 희생자 프리츠 프뤼머(Fritz Frommer). 유대인 사업가. 살해 후 첫 번째 희생자와 같은 정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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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번째 희생자 레이몽 르소브(Raymond Lesobr). 부동산 중개인. 살해 후 5000프랑을 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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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인을 체포한 경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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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포 후 압송되고 있는 오이겐 바이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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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포 후 압송되고 있는 오이겐 바이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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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거물로 확보된 범행도구를 살펴보는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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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거물로 확보된 범행도구를 살펴보는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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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에서 발견된 첫 번째 희생자 장 드 코번의 시신을 관에 담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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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드 코번과 프뤼머의 관이 나란히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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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증을 위해 범행 현장으로 끌려가는 오이겐 바이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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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호사 재닌 켈러를 살해한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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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닌 켈러를 살해한 퐁텐블로 숲에 서 있는 오이겐 바이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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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검증 후 기자회견에 경찰이 답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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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거물들을 살펴보는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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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쇄살인범 오이겐 바이트만의 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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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을 받고 있는 오이겐 바이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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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을 받고 있는 오이겐 바이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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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겐 바이트만의 재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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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범 로저 밀리옹의 애인 콜레트 트리코와 그녀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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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정의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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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대의 사건에 취재를 위해 몰려든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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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에 전화선을 설치 중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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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 판결 후 판사가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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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치된 단두대 주변으로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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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두대를 둘러싼 군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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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옥에서 끌려 나오는 오이겐 바이트만. 시신을 담을 관 뚜껑이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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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두대의 칼 아래에 결박되는 오이겐 바이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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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 집행 몇 초 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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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이 떨어지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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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행 후 단두대를 해체 중인 모습


결과적으로 이 사형집행은 프랑스의 마지막 공개처형으로 남았다. 그 이유는 사형집행 시 여러 건의 돌발상황들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공개처형을 보고자 몰려든 구경꾼들은 범죄자에 대한 과도한 난폭함과 분노를 표출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또 단두대의 조립이 잘못되어 집행 시간이 지체되는가 하면, 사형집행을 몰래 촬영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결국 알베르 르브륑(Albert Lebrun, 1871~1950) 프랑스 대통령은 공개처형을 영원히 금지시켰고, 이후 1981년 9월 9일을 기해 프랑스는 사형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단두대는 사형제도 폐지 전까지는 비공개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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