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혁명] 홍위병의 진상 폭로수기 ④
– 인명을 헌신짝 취급
– 고문 경쟁 벌이기도
– 꼽추 교직원을 철봉대에 매달아
– 여학생도 물어뜯고 욕설 퍼부어
– 스승 부부에 추행 강요
우리들의 입체기하 선생은 국민당의 충실한 주구라는 비난을 받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가르침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쏟지 않는 늙은 책벌레였다. 그는 헌식적이고 편견 없는 교사였다. 나중에 나는 그의 강의에 낙제한 몇몇 학생들에 의해 그가 죄를 뒤집어썼음을 알았다. 그는 지독히 얻어맞고 발에 차였으며 그러고 나서는 캄캄한 골방에 팽개쳐졌다.
우리의 음악 선생은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음악에 아주 조예가 깊었다. 한때 말조심 안 한 탓으로 그는 반란을 꾀하는 우익주의자라는 규탄을 받고 땅바닥에 팽개쳐져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마구 짓밟혔다. 그는 뚱뚱한 몸집이었는데 얼굴, 배, 엉덩이 할 것 없이 짓밟히고 얻어맞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역시 음악 선생이던 자기 아내와 함께 ‘우리는 악당입니다’라는 노래를 듀엣으로 부르라는 명령을 받았다.
화학 선생은 한때 수업 중 “플러스 전자와 마이너스 전자가 서로 끌어당기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었는데 그는 팬티를 벗고 고문자들의 악취미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실제로 그 강의 내용대로 시범을 보이라고 명령받았다.
● 벌레 먹이고 광대놀음
그는 또 대학 합격자 수를 늘려야 한다고 자주 강조했었기 때문에 세뇌를 받지 않으면 안 될 부르주아 교육자라는 규탄을 받았다. 그는 수년간 몇 명의 학생들을 중독시켰나 고백하도록 강요받았고 곤충을 먹고 광대놀음을 하고 추한 자화상을 만화로 그리도록 강요받았다.
우리 학교체육기구 관리인은 1957년 반우익 운동 때 구 우파분자로 공개 규탄을 받았다. 그의 옛 외상거래는 이제 와서 새삼스레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는 꼽추였으므로 악의에 찬 놀림감이 됐다.
그의 꼽추를 치료한답시고 홍위대 들은 등받침대를 벗긴 채 철봉대에다 매달아놓았다. 그는 또 머리를 처박고 4층에서부터 계단을 기어 내려오도록 명령받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한 학생이 그의 곱사등에 올라타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 학생들이 그들 선생들의 머리를 깎은다음 벌레를 억지로 먹이고 있다. 이 그림 역시 수기의 주인공이 그린 것으로 선생들은 그들 죄상이 적힌 플래카드와 함께 벌레통을 쥐고 있다.
● 가족 없으면 자살생각
우리의 홈룸 선생은 주로 내가 애쓴 덕분에 우리 학교 선생 가운데서 수치스러운 모욕을 피한 단 한 사람이 됐다. 그는 장문의 감동적인 편지를 나에게 부쳐온 일이 있었다. 그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지난 며칠 동안의 투쟁을 목격하고 나는 아직도 그 일이 정말인지 믿을 수가 없네. 모든 게 악몽인 것만 같아. 우리는 낮에는 긴장을, 밤엔 테러의 공포를 견디고 있네. 많은 선생들이 인간의 인내의 한도를 넘는 고문을 당했네. 사람들은 모두가 그들의 품위를 잃고 정신적으로 뒤죽박죽이 돼버렸어. 나는 가족들만 아니었던들 틀림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을 걸세…”
그에게 보낸 답장에서 나는 반성문을 써오도록 하고 그것을 네 번이나 가필하여 평가회에 제출했다. 나는 그 회의에서 그가 이번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가하고 있었으며 그의 반성문이 아주 진지하다고 두둔했다. 내 말에 아무런 반론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구제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당한 사람들은 부지기수여서 낱낱이 예를 들 수가 없다. 이들의 잔학행위에 대한 죄를 따진다면 직접 고문에 가담했던, 완력은 세지만 지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난폭한 멍텅구리들에게만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폭도들을 뒷전에서 부추겨서 고문을 자행케 한 자들에게 죄가 있는 것이다.
● 죽이는 건 사소한 일
학교에 남아있던 한 공작대원은 다음과 같은 지령을 내려 한몫했다.
“어떤 자를 때려 죽게 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혁명을 수행하는 것. 수정주의를 뿌리 뽑고 순수한 적색을 유지하는 일이다. 이러한 수정주의 망령, 악령들은 모두 반당 사상, 반사회주의적, 그리고 반모(毛) 사상이다. 이들이 많이 사라지면 질수록 위험은 그만큼 적어질 것이다.”
고문자들은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즉 “국가가 너를 때리라고 나에게 시키고 있다. 모왕석(毛王席)이 그렇게 하도록 나에게 명령하고 있다. 너희가 올바른 이데올로기를 터득하게 되면서 더 이상 고통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라고.
그래서 어떤 반동분자들은 스스로 매를 먼저 맞겠다고 자청하고 나서기도 했다.
▲ 군축도(群丒图)
군축도(群丒图, 악마들의 무리): 위 만화는 문화혁명 때 수정주의자로 낙인찍혀 축출당한 39명의 지도자를 풍자한 것이다. 위 중앙 가마에 타고 있는 사람이 유소기(류사오치, 劉少奇) 그 뒤 검은 옷차림인 등소평(덩샤오핑, 鄧小平), 줄 맨 끝에는 도주(타오주, 陶鑄)가 서 있다. 줄 맨 앞에는 전 공산당 선전부장 육정일(루딩이, 陸定一)이 북을 치고 있고 전 북경시장 팽진(펑전, 彭眞)이 ‘이월제강(二月提鋼)’이란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 고문 이름이 ‘자기혁명’
그들은 이렇게 선수를 써서 매를 덜 맞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 홍위병들은 ‘자기혁명’이니 ‘쌍방혁명’이니 하는 묘한 고문 수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자기혁명이라는 것은 반동분자들로 하여금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복창하면서 자기 뺨을 때리도록 하는 방법이었으며, 쌍방혁명이라는 것은 독에는 독으로 라는 전형적인 방법을 응용하여 반동분자들이 서로 싸우도록 하는 것이었다.
고문자들은 일상생활의 모든 일에서 기막힌 고문 수법을 발명해냈다. 심지어 식사 때 쓰는 젓가락까지도 고문도구로 사용하는 방법이 고안될 지경이었다. 어떤 학생들은 온종일 고문에만 힘을 기울이는 판이었다. 그래서 소집회를 열어 사람들을 신나게 패는 방법에 관해 체험의 교환이 유행처럼 됐다.
나는 이들 학생들이 너무 심하다고 느꼈다. 더욱 한심스러운 일은 여학생들까지도 난폭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혈질이고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들은 책상을 ‘쾅’ 치고는 눈을 부릅뜨고 사람들을 노려보는 것이 예사였다.
반동분자들을 심문할 때 여학생들은 개새끼니 화냥년이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지껄였으며 남학생들로부터 배운 이보다 훨씬 지독한 상소리도 마구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얼굴을 물어뜯기도 하고 뺨을 갈길 정도였다. 심지어 어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과 고문에 경쟁을 하자고 나서는 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