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혁명] 홍위병의 진상 폭로수기 ⑥
– 살갗 도려내기 고문
– 약물 먹여 심문 반응의 실험 도구로
– 굴복할 때까지 매질
– 체형의 심리까지 연구
나는 당시 내가 침착하지 못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당시 나는 예쁘장한 여학생 비서 및 간호원들과 학교에서 같이 기거했다. 이들에 둘러싸인 나는 결코 무뚝뚝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장난을 걸어오고 낄낄대는 여학생들을 때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내버려 두면 내 명령이 지켜지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장난에 싫증을 냈고 여학생들이 천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무실에서 장난을 치고 낄낄대는 것은 나의 무책임으로 돌려졌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더 잘 화합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휴식시간과 밤에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7월 중순, 우리들 가운데서 남학생 5명과 여학생 2명 등 모두 7명이 비공개로 ‘심리연구반’이란 그룹을 만들었고 매일 저녁 모임을 열어 그날그날 죄수들을 다루면서 느낀 경험담을 서로 나누었다. 고문은 새삼스런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했다.
나치당이 프랑스 포로들을 데려다 장미꽃 문신이 그려진 피부를 도려내어 램프 갓을 만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겐 고문이란 하나의 예술로 생각됐다. 반동분자들 중 많은 수가 그들의 살갗이 도려지는 고통을 필연적으로 치르게 돼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들의 심리연구란 예를 들면 죄수들이 갖는 공포심이란 무엇이며 그들은 왜 공포심을 갖게 되는가 그리고 또 공포심을 갖게 된다는 것은 좋은 일인가 하는 등등을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점차 우리들은 심문이나 고문 과정에서 죄수들이 나타낸 갖가지 반응들이 다른 죄수들을 다루는데 많은 참고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 사이에는 죄수의 반응 여하에 따라 “그 녀석은 XX방식으로 다루게”하는 식의 통용어가 생겨나게 됐다. 말하자면 그것은 모택동의 이른바 “그 병에는 그 약”이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심리연구반은 공개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당의 정식 채널로도 금지돼있는 말하자면 심각한 범법행위였다.
▲ 광동지방에는 160만의 홍위병들이 집결됐는데 사진은 그들중 일부가 한자리에 모여 혁명교의(革命敎義)를 읽고있는 모습이다. 1967.02.06.
● 곳곳에서 저주의 소리
그럼에도 우리들은 연구를 계속했고 급기야 인원도 30명 가까이로 불어났다. 우리들은 점차 우리들이 행한 연구가 부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것은 죄수들에게 마취제를 먹인다든지 심문 과정에서 죄수들의 신경구조를 컨트롤하는 약제를 사용하는 등의 우리가 시험해보지 못한 많은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였다.
그러나 죄수들을 실험대상으로 한 우리들의 연구와 실천은 계속됐고 ‘어른들에 도전하는 애새끼들’ 혹은 ‘붉은 테러 짐승’이라고 우리들을 저주하는 주위의 지독한 욕설에 조금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들은 우리가 타도해야 할 대상이 우리들의 선생과 어른들이라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저마다 자기주장이 있었다. 신체적인 고문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내세우는 이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정신적인 고통이나 박해가 좋다고 했다. 잔인한 방법과 부드러운 방법을 적당히 섞어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나는 언제나 새로운 방법을 써보려고 애썼으며 절대로 남의 방법을 모방하지 않았다. 나는 심문받는 죄수들이 미리 준비된 대답이나 판에 박힌 대답을 하지 못하도록 종종 기대 밖의 질문을 즐겨 던졌다. ‘준비되지 않은 싸움을 절대로 하지 말라’는 모택동의 모토는 나의 심문 방법에서는 예외였다.
우연적이고 신축성 있는 방법을 나는 즐겨 썼다. 나는 자부심을 가졌고 그것을 내세우기를 좋아했다. 나의 오만에 죄수들이 굴복해주기를 바랐다.
▲ 홍위병들은 거리에서 버스나 행인들을 막고 ‘마오쩌둥 어록’을 낭독했다.
● 대항자는 마구 때려
그래서 내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 죄수를 만나면 나는 가끔 미칠 지경이었다. 언젠가 한번 고집이 대단한 죄수를 만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와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호위병을 멀리 가게 하고 문을 걸어 닫았다.
그러자 그는 발끈 달아올라 의자를 집어 들고는 “먼저 너부터 죽이겠다”면서 나에게 대들었다. 나는 맞지 않으려고 방안을 빙빙 돌았고 그때서야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후회했다. 때마침 호위병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위기는 모면했지만 사무실 안은 엉망이 됐고 내가 아끼던 조그만 꽃병도 박살나 있었다.
나는 미칠 듯이 흥분하여 “그놈을 두들겨라 두들겨”하고 소리소리쳤다. 내가 안정을 되찾았을 때 나는 녀석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아 녀석을 끌어내다 내가 마음이 찰 때까지 다그쳐 심문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내가 완전히 정상을 회복했을 때 나는 침착하지 못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자신을 후회했다. 지독한 매를 맞은 그를 보자 나는 마음이 무척 언짢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사과하고 싶었으나 내 위신도 있고 해서 그렇게 하질 않았다.
죄수들과의 이 같은 심리전이 두 달간 계속되는 동안 나는 두 달이라는 그 짧은 기간에 나 자신이 엄청나게 변한데 소스라쳐 놀랐다. 천진난만했던 나의 학생 시절과 청춘은 내 뇌리 속에서 사라져 가 버렸다.
내 몸은 비록 16세의 소년이었지만 내 마음은 어엿한 한 성인으로, 사회적 책임이 있는 한 성인으로 성장해있었던 것이다. (끝)
이 수기를 쓴 것은 푸젠성 샤먼시 출신인 첸융성(陳永生)이란 인물이다.
그는 샤먼시 공예미술학원(廈門市工藝美術學院)에서 공부했으며,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선전포스터를 그리는 것으로 참여했다. 그 결과 홍위병들의 잔혹한 행위에 대해 누구보다 더 많이 접할 수 있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모택동에 대한 증오심이 점점 깊어져 간 계기가 되었다.
1968년 가을, 공산당이 홍위대를 체포하여 농촌의 노동수용소로 보내기 시작하자 생명에 위협을 느낀 첸융성은 진먼섬(金門島)을 향해 헤엄쳤고 대만에 정착했다. 이후 조국에 있는 동포들에 대한 연민과 모택동에 대한 증오심으로 홍위병과 모택동의 흉악한 범죄를 수기와 그림으로 묘사하여 당시의 처참함을 폭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