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공산화와 재교육 수용소
월남 패망의 날
1975년 4월 30일 정오, 월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 사이공의 도심에는 무조건적인 항복 소식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라디오에서는 도시 느낌이 물씬 나는 선곡 대신 행진곡과 혁명가가 흘러나오고 강렬한 억양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이튿날부터 모든 학생들과 정부기관의 사람들은 오전 8시까지 독립 궁전 앞에 모여 깃발을 들고 해방을 축하하는 집회에 참여해야 했다. 거리에는 ‘독립과 자유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라는 호찌민의 잠언이 물결치고 있었다.
▲ 아침부터 정신교육을 받는 학생들
이런 열띤 분위기 속에서도 현실을 부정하는 반공 세력들이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지 뉴스에는 테러 소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이에 베트남 노동당은 이대로 두면 민족화합과 진정한 통일은 요원하다고 판단하고 새롭게 탄생한 공산정권에 기여할 올바른 시민을 함양하기 위한 재교육 수용소를 전국 150군데에 설치하게 된다.
재교육 수용소 입소
수용소 입소자는 아래와 같이 분류되었다.
1. 괴뢰(베트남 공화국) 군인: 중위 이상의 장교 및 행정관
2. 괴뢰 정부 공무원: 경찰, 사법부, 행정부
3. 괴뢰 당원: 지구당 이상의 당원과 조직의 핵심 인물
4. 항복 및 배신자: 탈북자, 간첩, 대북선전 활동가
※카테고리 분류에는 없지만 반정부 활동가, 작가, 언론인, 예술인, 종교인들도 입소되었다.
▲ 수용소 입소를 앞두고 있는 경찰과 공무원
‘재교육은 선량한 시민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기치 아래 모인 입소 대상자들은 가족 배경, 주소, 살아온 인생, 친척 관계, 지인들, 정치 성향, 연도별로 어디서 뭘 했는지, 재산은 어떻게 형성했는지 등등 20페이지 이상의 서류를 꼼꼼히 작성해야 했다.
하지만 입소자의 신상은 진작에 다 파악되어 있어서 처음부터 열심히 작성할 필요는 없었다. 담당 관리원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성실성 부족, 자아비판 부족, 반동적, 괴뢰 활동 은폐 등의 이유를 들어 수차례 재작성을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서류가 통과되고 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록과 대조하며 세부사항을 확인하고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관계를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입소식을 마쳤다.
▲ 수용소 입소를 앞둔 반동시민들
수용소의 실태
재교육 프로그램의 주요 강의는 다음과 같았다.
– 미국과 월남의 추악한 범죄
– 위대한 사회주의 이론 알아보기
– 베트남 노동당과 베트남 정부의 관대한 정책을 찬양하라
교육생들은 수업과 함께 ‘자아비판’을 작성해야 했는데, 밤을 새워 쓴 후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고식을 가졌다. 보고식에서 누구보다 더 열렬히 자아비판을 한 교육생은 ‘진보적(tiến bộ)‘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 수용자들의 모습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월남의 군인들과 공무원, 착취 계급들을 모아놓은 재교육 수용소는 원한을 갚을 수 있는 무대였다. 이들이 교육생들의 육체와 정신을 파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강제노동과 굶주림이었다.
‘노동은 영광스럽다’라는 외침과 함께 하루 8시간의 강제노동이 시행되었는데, 주로 나무를 베거나 심고 교육생들이 먹을 작물을 키우기 위해 땅을 갈고 우물을 파거나 전쟁 중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이었다. 매일매일 교육생들이 달성하기 힘든 할당량이 주어졌기 때문에 사는 것이 고문과 다를 바 없었다.
또한 굶주림은 인간의 의지를 장기적으로 파괴하는 방법이었다. 수용소 내 식량 보존시설의 열악함과 베트남의 어려운 경제사정이 겹치면서 수많은 교육생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이렇게 교육생들은 월남 정부를 위해 일한 시간에 비례해 3년에서 10년의 교육을 받았으며, 최대 15년까지 수용소에 머무른 사람도 있었다. 또한 모든 월남인들 3명 중 1명은 재교육 수용소에 들어간 친척이 있었을 정도로 이들은 철저하게 2등 국민으로 분류되었다.
▲ 13년 만에 석방된 남자와 가족들의 재회
베트남 정부는 재교육 수용소의 인권실태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자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며 우려를 불식시켰다.
“남베트남 지역이 해방된 이후 괴뢰정권에서 일하거나 협력한 사람은 스스로 노동당에 자수해왔다. 노동당의 인류애, 용기, 민족 화해 정책 덕분에 이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하고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당의 배려로 재교육 시설에 입학시켰다”
재교육 수용소를 수료한 교육생들은 6개월에서 1년 간의 집행유예 기간을 거쳐 정상 시민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미 국무부에 따르면, 수용소를 나온 사람들 중 35,000여 명이 미국으로 탈출했다.(친척까지 포함하면 16만여 명)
▲ 북베트남 군인에게 강제로 머리를 잘리는 사이공 시민
이들은 과거의 무질서와 자유로운 시위의 소음, 따분하고 무료한 일상조차 실은 목숨을 걸고 지켰어야 할 자유의 산물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