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의 사망과 장례식 풍경

이완용의 마지막


평소 지병으로 심한 기침 증세가 있던 이완용은 노쇠하여 병세가 악화되어 감에 따라 두 일본인 의학박사 이와이 세이시로(岩井誠四郞), 이와부치 도모지(岩淵友次)와 덕제병원장 원덕상(元悳常, 1883~1961)이 침소 옆을 떠나지 않았다.

 

이와이 세이시로와 이와부치 도모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와병 중일 때도 진료를 담당한 최고의 의료진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완용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순종실록부록 17권. 04월 06일. 3장 A면)

 

1926년 2월 11일 11시경, 이완용의 용태가 중해지자 의사들은 약을 권했으나 이완용은 초췌한 얼굴로 “나는 두 시간 후에 죽을 사람이니 다시는 약을 권하지 마시오.”라는 말을 하였는데 예언이라도 한 듯 실제로 두 시간 후인 오후 1시경에 별세하였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이는 의사 세 명 외에 한상학(韓相鶴), 이윤용(李允用), 이항구(李恒九)였다.

 

이와이 세이시로와 이와부치 도모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와병 중일 때도 진료를 담당한 최고의 의료진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완용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순종실록부록 17권. 04월 06일. 3장 A면) 1
▲ 1926년 신년에 찍은 이완용의 마지막 사진 【京城日報 1926.02.13】


평소 이완용의 주치의였던 한국 최초의 내과의사 김용채(金溶埰, 1891~1931)에 따르면,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렸다’고 하며 약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기침과 천식이 심해지고 고열까지 찾아오면서 치료에도 차도가 없었고 폐렴까지 발병하였다. 이완용의 폐는 과거 피습으로 인해 왼쪽 폐의 기능이 상실된 상태였기에 이는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심장까지 상태가 안 좋아지며 갑자기 운명하게 되었다.

 

이완용의 기부


이완용은 특별한 유언은 남기지 않았으나 ‘형식 타파’를 입버릇처럼 말하며 평소 ‘영실(靈室)은 꾸미지말라’고 했기에 그것으로나마 유언을 삼게 되었다. 하지만 재산의 상속과 처리는 죽기 전에 이미 상세하게 명시해두었다.

 

생전에 학교비(學校費, 교육세)를 할인해줄 때까지 미납한 사례(교육세를 깎아줄 때까지 버틴 이완용) 때문인지 동아일보가 ‘부둥켰던 그 재물을 그만하면 내놓지!’라는 일갈을 하는 등 수전노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이완용 일가는 고인의 유지라며 거금 3만 원 사회사업에 써달라고 기부하기도 하였다.

 

이와이 세이시로와 이와부치 도모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와병 중일 때도 진료를 담당한 최고의 의료진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완용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순종실록부록 17권. 04월 06일. 3장 A면) 3
▲ 일본 천황으로부터 도착한 태사서(沙太書). 이왕가에서도 고 이완용에게 공물금액(祭祀料)을 하사하였다. 【京城日報 1926.02.18】


당시 ‘이완용의 재산은 1,000만 원 이상일 것’이라고 세간에서는 떠들었으나 실상은 그 정도는 아니었고, 아들 이항구의 재산을 합해도 100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투자의 신’으로 칭송되었던 반복창이 정점에 올랐을 때의 재산이 40만 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물론 이도 대단한 금액인 것은 사실이다.(미두왕 반복창에 대한 칭송 기사)

 

이완용이 기부한 금액 중 14,300원은 전국 43개의 사회단체에 기부되었다.

 

이완용의 장례식 풍경


장례식 상주는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李丙吉, 1905~1950)이었다. 당시 22세였던 이병길은 동경학습원 고등과에 재학 중이어서 빈소로 지정된 안방에는 이완용의 부인 조씨의 흐느껴 우는 소리만이 적막한 저택을 감싸고 있었다.

 

이와이 세이시로와 이와부치 도모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와병 중일 때도 진료를 담당한 최고의 의료진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완용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순종실록부록 17권. 04월 06일. 3장 A면) 5
▲ 사망 당일 이완용 저택 앞의 자동차 【京城日報 1926.02.13】


그렇게 상(喪)은 일단 비밀을 엄수하고 있었지만 이병길의 귀국이 빨라야 2월 14일 오전은 되어야 했던 관계로 결국 12일 오후 1시 20분에 발상(發喪)하고 장례절차 논의에 착수했다.

 

이와이 세이시로와 이와부치 도모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와병 중일 때도 진료를 담당한 최고의 의료진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완용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순종실록부록 17권. 04월 06일. 3장 A면) 7
▲ 14일 오전, 경성에 도착한 이병길 【京城日報 1926.02.15】


장례식은 18일 오후 2시에 옥인동 저택에서 출관발인하여 오후 4시에 용산역 앞 광장에서 영결식을 갖기로 하였다. 장의위원장은 유아사 구라헤이(湯浅倉平) 정무총감, 부위원장에 박영효(朴泳孝) 후작과 이쿠다 세이자부로(生田淸三郞) 내무국장으로 결정되었으며 그 밖의 위원까지 총 50명에 달했다.

 

이와이 세이시로와 이와부치 도모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와병 중일 때도 진료를 담당한 최고의 의료진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완용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순종실록부록 17권. 04월 06일. 3장 A면) 9
▲ 상복을 입은 이병길 【京城日報 1926.02.19】


장례 형식은 여러 가지 논의를 거친 결과, 의장병이 있는 관계로 옥인동 자택에서 용산역까지는 일본식 영구마차로 장의를 집행한 후 기차로 이리까지 간 다음부터는 조선식 상여로 장지까지 운구하기로 하였다. 장지는 이완용이 생전에 유명한 지관을 통해 점찍어놓은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로 이미 손질까지 마쳐두고 있었다.

 

이와이 세이시로와 이와부치 도모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와병 중일 때도 진료를 담당한 최고의 의료진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완용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순종실록부록 17권. 04월 06일. 3장 A면) 11
▲ 17일 오후 두시경, 이완용의 옥인동 저택 빈소를 방문했다 돌아가는 칙사들 【京城日報/朝鮮新聞 1926.02.18】


1926년 2월 18일, 이완용의 장의는 오후 2시에 옥인동 자택을 떠날 예정이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그의 마지막 모습을 기다렸다. 물론 단순히 구경온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이완용 일가의 곡소리에 옥인동 전체의 분위기는 비운에 잠겼다고 한다.

 

이와이 세이시로와 이와부치 도모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와병 중일 때도 진료를 담당한 최고의 의료진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완용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순종실록부록 17권. 04월 06일. 3장 A면) 13
▲ 광화문 거리를 가든 메운 인파 【京城日報 1926.02.19】


드디어 시작된 장의행렬은 경기도 형사과장의 인솔 하에 기마 순사가 앞장서고 뒤에는 의장병이 섰으며, 조선 전통의 소교의(素交倚) 한쌍과 곡비(哭婢) 한쌍이 곡을 하며 출발했다. 명정(망인의 관직과 성씨를 기록하여 상여 앞에 들고 가는 깃발)을 앞에 두고 일본 천황과 황후를 위시해 수많은 대신들과 관공서에서 보내온 화환 수백 개와 생전에 이완용이 받은 훈장들의 행렬이 친인척들의 손에 들려 행진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도키자네 아키호(時實秋穗) 경기도지사와 경무국장 조성근(趙性根, 1876~1938) 중장의 호위 하에 그의 시신을 실은 영구마차가 자택을 나섰다. 그 뒤를 이어 상주 이병길과 아들 이항구, 그리고 참회자 천여 명이 인력거를 타고 뒤를 따르는 등 이 행렬의 거리는 옥인동에서 광화문거리까지 이어질 정도로 근래에 가장 큰 장례식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이 세이시로와 이와부치 도모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와병 중일 때도 진료를 담당한 최고의 의료진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완용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순종실록부록 17권. 04월 06일. 3장 A면) 15
▲ 옥인동 19번지(현재 옥인파출소)에서 광화문까지는 무려 1.5km


오후 4시 30분, 흑백 휘장이 나부끼는 용산역 광장의 영결식장에 영구마차가 도착해 관이 안치되자 의장대의 장송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뒤따라온 천여 명의 참회자들의 경례가 끝나고 칙사들과 각궁 어사들의 예배와 분향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더욱 경건해졌다. 칙사를 맞는 영접위원은 한상룡, 이명구, 한만희였다.

 

이와이 세이시로와 이와부치 도모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와병 중일 때도 진료를 담당한 최고의 의료진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완용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순종실록부록 17권. 04월 06일. 3장 A면) 17
▲ 용산역 광장 영결식장에서 칙사가 분향을 하고 있다. 원은 이완용의 관을 안치하는 모습 【京城日報 1926.02.19】


당시 총독부 사회과에서는 이완용의 장례식 과정을 모두 기록영화로 남겨 사회교화의 교재로 삼을 계획을 발표했고 실제로 촬영도 한듯하지만 현재 전해지지는 않는다.

 

어느덧 장지로 떠나는 임시열차가 출발할 시간이 되자 용산역 일대는 수천 명의 군중을 비롯해 자동차, 마차가 엄청나게 몰려들어 일대 혼잡을 이루었다. 영결식이 끝난 뒤 관이 열차에 안치되고 상주 이병길과 주인 이항구를 비롯해 장지까지 가는 승객이 객차 두대에 올라탄 것이 오후 6시 25분이었다.

 

이와이 세이시로와 이와부치 도모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와병 중일 때도 진료를 담당한 최고의 의료진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완용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순종실록부록 17권. 04월 06일. 3장 A면) 19
▲ SBS에서 재현한 20세기 초 용산역 건물. 사실 철로가 있는 곳은 광장이었고 뒤쪽이 플랫폼이었다.


차장의 호각소리와 함께 열차는 검은 매연을 토해내며 이완용은 영욕의 경성을 뒤로한 채 영원히 남쪽을 향해 떠났다.

 

Reference:
• 경성일보. 薨去當日の李侯邸 (1926.02.13)
• 경성일보. 葬儀を活動寫眞に (1926.02.19)
• 매일신보. 장의위원발표. 용산역 앞에서 고별식 거행 (1926.02.14)
• 매일신보. 처량한 영결곡조에 천여 명의 조객들은 눈물을 머금었다. (192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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