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실의 엄격한 여행규정 내용
로열웨딩, 기사 작위, 대관식 등 ‘영국 왕실‘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는 언론과 세간의 주목을 받는 화려한 일상이다.
특히 방문지에서의 환영과 융숭한 대접을 보면 부러워할 만도 하지만 세상일이 늘 그렇듯 들여다보면 화려함 뒤에는 피곤한 규칙 일색이다.
개인 시간이 없는 빡빡한 일정
왕자나 공작 등 귀족은 물론이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여왕조차도 해외에 나가는 것은 거의 일 때문이다.
개인여행이 아니라면 방문 스케줄은 공식회의와 온갖 행사로 가득 차 있다. 왕실 담당 기자들에 따르면 해외를 순방하는 왕족들에게 주어지는 산책과 개인 시간은 1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같은 옷, 여러 벌
안젤라 켈리(Mary Angela Kelly)는 2002년부터 엘리자베스 2세의 개인비서이자 스타일리스트로 근무해온 인물.
해외순방 시 그녀는 여왕님 전용 여행가방에 같은 의상을 늘 두벌 이상 챙긴다. 이것은 사치가 아니라 돌발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와인을 마시다 옷에 흘렸거나, 옷이 찢어지는 등의 상황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옷을 갈아입어 여왕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다.
만약 한국을 방문해 식사를 하던 여왕 옷에 고추장이 튀었던 것 같은데 드레스가 깨끗하다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똑같은 여벌의 옷으로 바꿔 입은 것이다.
또한 영국의 올드 세대에게 있어왔던 전통으로 여왕은 착용하는 옷에 번호를 매긴다. 그리고 입었던 옷의 번호와 여행지에 대한 감상을 기록하기도 한다.
미리 협의된 음식메뉴
왕실의 수행원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왕실 구성원들이 먹을 메뉴를 미리 방문국의 요리사들과 협의를 거친다.
싫어하는 다량의 향신료가 들어가거나 해외까지 와서 배탈이 나지 않게 조개류 같은 해산물이나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또한 엘리자베스 2세가 좋아하는 메뉴는 일급비밀이다.
종종 여왕이 무슨 음식을 좋아한다거나 무언가를 먹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어 화제가 되곤 하지만 직접 밝힌 적은 없다. 이것은 좋아하는 음식이 공개될 경우 순방지에서 그 메뉴가 경쟁하듯이 항상 나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늘 휴대하는 검은 정장
죽음이란 누구에게든지 불시에 찾아올 수 있는 법. 이것은 왕족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영국 왕실 구성원들은 어디에 있든 늘 검은 정장을 휴대하며 왕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이 사망했을 경우 즉시 착용하고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게 대비한다.
이 규정은 엘리자베스 2세가 케냐를 방문했을 때인 1952년의 일 때문.
여왕의 부친인 조지 6세가 갑작스레 서거해서 귀국했을 때, 그녀는 검은 정장이 준비되지 않아 항공기에서 내리지 못한 채 대기하다가 준비가 완료된 몇 시간 후에나 내릴 수 있었다.
여왕을 보필하는 수많은 수행원
해외를 방문하는 대통령도 많은 수행원이 따르지만 역시 군주에게 비할바는 못된다.
해외순방 시 엘리자베스 2세는 개인비서인 안젤라 켈리를 비롯해 왕실 사진작가, 미용사, 보디가드 등 수많은 수행원들을 데려간다. 그녀는 수십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기 때문에 항상 근처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세계 각국의 간단한 언어와 에티켓 습득
왕실 구성원들은 방문하는 국가의 인사말이나 에티켓을 미리 익혀두어야 한다.
각 여행지마다 담당 어시스턴트가 별도로 있으며, 모든 왕실 구성원들이 충분히 똑똑한 건 아니므로 개떡처럼 말해도 좋은 말로 순화해서 전달해주는 똘똘한 통역관도 왕실 품위를 위한 중요한 인원이다.
여권이 없는 엘리자베스 2세
왕실 구성원들도 여권은 필요하다. 가장 어린 왕족들 조차도 해외로 나갈 때 아기용 여권을 받아야 한다.
세관 및 출입국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은 일반인들과 마찬가지. 다만 올림픽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처럼 절차는 빠르고 간편하게 진행된다.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의 모든 여권이 본인 이름으로 발행되기 때문에 유일하게 여권이 필요 없는 인물이다. 이런 그녀도 출입국시에는 신분확인을 위해 이민국 공무원에게 구두로 나이, 성명, 국적, 성별 및 출생지를 말하는 절차를 거친다.
한편, 그녀는 영국에서 운전면허증이나 번호판 없이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선순위 상속인들의 ‘함께 여행금지’
영국 왕위 계승 순위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자와 서열 3위인 그의 아들 조지 왕자(2013년 7월 22일생)는 비행기나 기차로 장거리 여행을 할 때 예전이라면 함께 여행할 수 없었다. 공식적인 규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경우 왕위 계승자들이 동시에 사라질 수 있기 때문.
암묵적인 규정을 변경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역시 엘리자베스 2세였다. 윌리엄 왕자는 겨우 9개월이었던 조지 왕자를 떼놓고 다니기 힘들어 할머니께 규정 완화를 허락받았다.
조지 왕자는 2014년 4월, 부모와 함께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했으며 2016년 9월에는 캐나다를, 2017년 7월에는 폴란드와 독일을 다니며 총 3편의 비행기를 함께 탔다. 다만 윌리엄 왕자가 뉴욕을 방문했던 2014년 12월에는 유모와 할머니의 곁에 머물렀다.
아직은 어려서 완화된 규정이지만 조지 왕자가 12세가 되는 2025년이나 2026년부터는 같은 항공편을 이용할 수 없게 될 전망이다.
긴급 수혈을 위한 혈액 휴대
왕실 구성원도 신이 아닌 이상 응급상황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법. 의료상황이 좋지 않은 국가를 방문할 때 수혈팩을 휴대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지는 규정이다.
여왕뿐만 아니라 질병이 있거나 나이가 많은 왕족에게도 적용되며, 주치의도 함께 여행하는 것이 당연하다. 주치의는 왕립해군에 소속된 의사로 여행 시 여왕의 동선에 따라 가장 가까운 병원을 체크해놓는다.
기밀사항이겠지만 이런 응급체계는 일반적인 공화국의 대통령에게도 비슷한 규정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예로 2017년 11월 7일, 국빈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경우 의전용으로 ‘캐딜락 원(Cadillac One)’을 이용했는데, 차량의 트렁크에는 유사시 긴급 수혈이 가능하도록 대통령의 혈액형과 같은 혈액을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