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이후 최초의 남남북녀 커플
요즘은 탈북자(새터민)가 한해 천명 단위로 입국해서 크게 화제가 되지 않는 시대이지만,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1993년까지만 해도 입국하는 탈북자는 한해 10명 아래였다.(90년 9명, 91년 9명, 92년 8명, 93년 8명)
하지만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북한의 식량난이 이어지면서 90년대 중반부터 탈북자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2002년에는 천명을 돌파했다.
▲ 2008~2018 탈북자추이
특히 탈북자가 희귀하던 시절에는 정치적 귀순이 많아 여성의 비율이 10%에 불과했으나 최근에는 생계형 탈북자가 많아져 여성의 비율이 90%에 달하고 있다.
이처럼 탈북 자체도 희귀한 1989년 9월 10일, 3명의 북한 사람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한강 하류를 3km가량 헤엄쳐 강화군 김포반도 부근으로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헤럴드포토 1989.9.11.
이들 중에는 여성 한 명이 포함되어 있어서 더 큰 화제가 되었는데 바로 개성시의 소아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던 임정희(당시 24세)씨다.
5월부터 4개월간의 치밀한 준비 끝에 내려온 이들은 귀순 동기를 『북한이 사회주의 사회라고 떠들어대면서도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는 등 생활이 불안정한데도 김일성 부자 우상화와 특히 최근 김정일에 대한 아첨이 늘고 경제적으로 고립된 체제에 염증을 느껴 죽음을 각오하고 귀순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 경향신문(좌) / 동아일보(우) 1989.9.11.
지금도 당시의 사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막 귀순하는 급박한 상황에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고 보도를 위해 재연하는 모습이다.
화제의 귀순 후 의례히 그렇듯 시간이 지나며 이들은 서서히 잊혀졌으나 1991년 8월 31일, 임정희씨가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되는데 바로 분단 후 최초의 남남북녀(南男北女) 부부의 탄생이다.
▲ 경향신문 1991.9.1.
북한에서의 간호사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 한국통신 미아전화국에 수습사원으로 입사했던 그녀는 같은 회사 서모씨의 프러포즈를 받았고, 결국 결혼에 골인하며 한국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그녀의 결혼식에는 남파 무장공작원 출신 김신조씨도 참여하였고, 당시 안기부장과 경찰청장 등의 축의금도 답지했다고 한다.
이후 1996년에는 탈북자 출신 영화감독인 정성산씨와 함께 극단 ‘오마니’의 창단 멤버로도 참여하였다는 소식을 끝으로 뚜렷한 활동사항은 없다.
한편 당시 같이 넘어왔던 김남준씨는 직장을 다니다 개업한 ‘함경진순대’ 체인점을 구상하다가 안타깝게도 1998년 작고하였다.
▲ 네이버플레이스. 함경진순대
이 업체를 당시 부인이 이어받아 현재까지도 운영하고 있는데, 업체 소개란에 ‘1989년 임진강을 수영으로 건너온 김남준씨가 북한 군민들이 일 년에 한 번 돼지를 잡아 순대를 만들어 먹던 그 방식 그대로 만든 순대입니다.‘라는 문구를 적어두고 있는 모습이다.
옛날 뉴스보고 검색했는데 남한에서 10년도 못살고 돌아가셨군요😔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자유를 짧게나마 누리고 가셔서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