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동 박태성과 인왕산 호랑이 이야기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효자를 꼽으라면 조선 후기 영조 때의 박태성(朴泰星)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실 박태성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이미 그를 접했을 수도 있는데, 오늘날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당시에는 효자리)이 바로 박태성의 효행을 기리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기 때문. 또한 그의 묘와 정려비(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그들이 살았던 고을에 세운 비)도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박태성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버전으로 각색되어 전해지는데 아래의 글은 1939년에 발행된 잡지 ‘家庭の友 16호’에 실린 것이다.
30리가 넘는 산소에 풍우를 무릅쓰고 날마다 참배한 조선의 효자 박태성(朴泰星)
박태성은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으나 세상에 난지 몇 달 후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글도 무던히 잘하는 점잖은 선비였습니다. 슬하에 자식이라고는 갓난아기 박태성 하나뿐이었으나 재미도 못 보고 서울 온 지 불과 3년 만에 그 아버지는 귀애하는 세 살 먹이 외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늘같이 바라고 있던 그 부인은 앞이 캄캄해졌으나 세 살 먹은 외아들을 잘 키워 돌아가신 남편의 뒤를 잇게 하려고 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속으로는 슬픔을 억제하면서도 겉으로는 웃는 얼굴로 대해주었습니다.
그 아들 태성이가 점점 자라나서 나이가 차니 하루는 어머님에게 이제부터라도 아버지의 상복을 입겠다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님의 말씀이 어린애가 몽상(蒙喪) 중에 행여 병이 나면 지하에 계신 선친에게 도리어 불효가 될 것이니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상복은 입지 아니했으나 그날부터 삼 년 동안 무슨 고기든지 먹지 않고 철난 상제(喪制)보다도 더 근신하고 지냈습니다.
그 후 어머님마저 병환이 들어 자리에 누우시니 태성은 밤에 옷도 벗지 아니하고 극진히 간호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46년 동안 하루같이 하였건만 어머님 병은 더욱 노쇠하여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친의 산소인 고양군 신도면 삼각산 후록(後麓)에 장사하고 서울서 35리나 되는 먼길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보라가 심하게 치는 겨울이나 날마다 산소에 가서 절하고 왔습니다. 서울서 서문 밖을 나서면 오늘날의 모화관(속칭 무아간)은 전차가 놓이고 인가가 총총히 섰지만 몇백 년 전 옛날에는 솔숲이 하늘을 가리었고 유명한 인왕산 호랑이가 오락가락하였습니다.
전날과 같이 태성은 방갓을 쓰고 소맷동 긴 상복을 입고 얼굴에는 포선(布扇)을 가리고 아침 일찍이 모화관에 다다른 때입니다. 천만뜻밖에 집채 같은 호랑이가 앞을 막고 나섰으나 산소에 참배 가는 길이라 조금도 겁내지 않고 그냥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호랑이는 여전히 앞을 막고 나섰습니다. 자꾸 발 앞에 와서 등을 내밀고 드러 엎드리는 호랑이를 이상히 여겨,
“너는 산중에 영물이어서 내가 갈길이 바쁜 줄 잘 알 것이요. 또 주리면 얼른 해할 터인데 그렇지도 아니하고 순한 말처럼 내 앞에 등을 대니 타란 말이냐?”
하고 사람한테 하듯이 말하였더니 그 호랑이는 타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려 얼른 탔더니 비호같이 산소까지 태워다 주고 또 모화관까지 데려다주더니 인왕산으로 자취를 감추기를 태성이 죽는 날까지 하였습니다.
그 후 태성이가 죽어 선산 아래에 장사를 하니 그 호랑이가 태성이 무덤 앞에 와서 또 죽어서 그 앞에 장사하고 호랑이 무덤이라 오늘껏 해오고 그 동리를 ‘효자리’라고 했으며 고양군수가 그 말을 듣고 「효자 박태성의 문(孝子朴泰星之門)」이라고 그 무덤 앞에 세워 천년만년 조선 효자라면 박태성이를 손꼽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무학재를 넘어 홍제원 박석고개를 지나 진관사 앞 내를 건너 지금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 앞 내 오른편 두둑 위 논밭 기슭에 「朝鮮孝子朴公泰星旌閭之碑」이라고 쓰인 청석(靑石) 비석이 서있으며 그 옆에는 「崇禎四紀元丙申八月日改建」 「不肖曾孫允默謹書」라고 쓰여있는 산소와 호랑이 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家庭の友 16호. 1939.11.01.】
온라인 지도로 본 정려비와 내용
박태성 정려비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로 522 인근에 세워져 있는데 온라인 지도를 통해서도 구경할 수 있다.
▲ 네이버 지도로 본 정려비. 2019년 10월
▲ 구글 지도로 본 정려비. 2018년 10월
▲ 카카오맵으로 본 정려비. 2021년 6월.
• 네이버 지도 – 박태성 정려비
• 카카오맵 – 박태성 정려비
• 구글 지도 – 박태성 정려비
▲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5호 박태성 정려비 ©두산백과
정려비의 앞면에는 「朝鮮孝子朴公泰星旌閭之碑(박공 태성 정려지비)」라고 적혀있고 뒷면에는 「崇禎四紀元丙申八月日改建(숭정 기원후 네 번째 병신년 8월에 개축하다)」 「不肖曾孫允默謹書(불초 증손 윤묵 삼가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1628년 즉위)의 연호로 네 번째 병신년은 헌종 2년인 1836년을 말한다.
※ 박윤묵(朴允黙, 1771-1849)은 박태성의 증손으로 당시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박태성과 호랑이의 묘는 온라인 지도에서는 확인하기 힘든데, 그래도 네이버 지도는 무덤 입구 표지판까지는 보여주고 있다.
▲ 좌측 정려비 위치에서 직진하면 우측 ‘효자동 박태성 묘’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 박태성의 묘 ©두산백과
▲ 함께 조성된 인왕산 호랑이의 묘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