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조선인 빙상 삼총사’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일본대표 7명 가운데 3명이나 선발되며 실력을 인정받을 정도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
▲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아이스링크

 

일본대표 선발전은 올림픽에 앞서 1934년 제5회 전 일본 빙상선수권 겸 올림픽 예선으로 치러졌는데 조선인 선수들의 실력은 뒤지지 않았다. 결국 최종예선에서 김정연이성덕장우식이 일본대표로 선발되어 당당히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다.

 

식민지 조선의 언론과 대중들은 현대의 축구 월드컵과 마찬가지로 빙상 선진국들에 비해 열세임을 알면서도 힘겨운 경쟁을 뚫고 참가한 동계올림픽인 만큼 세 선수에게 거는 기대도 매우 컸다.

 

대회 전 쏟아지는 격려

 

“건투하라!”

–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세 선수에게 본사에서 격전을 발송


본사에서는 멀리 구주(歐洲)남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금일 오후 5시(조선 시각)부터 연 4일간 열리는 제4회 동계올림픽의 스피드스케이트에 출장하고자 대기 중인 우리 세 선수에게 11일 오전 8시 다음의 격려 전보를 발송하였다.

 

남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 회장 내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 군에게 자중건투를 우리 해내(海內)는 빈다.

– 조선 경성 광화문통 동아일보사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3
▲격려통지문 【동아일보 1936.2.12.】

 

참가 선수들의 면면


1. 김정연
(金正淵, 1910~1992)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
▲ 김정연의 출발자세 【동아일보 1936.2.11.】

 

김정연은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생으로 공립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했으며, 1933년과 1934년 전일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를 연패했다.

 

1936년 올림픽에 긴-세이엔(きんせいえん)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한 김정연은 1500m에서 15위, 5000m 21위, 10000m 13위라는 결과를 낸다. 특히 18분 2초 7이라는 기록은 본인이 가지고 있던 일본 기록 18분 24초 5를 21초 8이나 단축한 것이었다. 이 기록은 1976년 동계올림픽에서 이영하 선수가 5000m 13위를 차지하기까지 한국 동계올림픽 최고 성적이었다.

 

 참고로 1936년 스피드 스케이팅은 노르웨이의 이바르 발랑그루드(Ivar Ballangrud)가 4개의 금메달 중 500m, 5000m, 10000m에서 3개의 금메달을 쓸어 담고 1500m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당대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그의 10000m 기록은 17분 24초 3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7

▲ 김정연의 올림픽 기록

 

메이지대학 졸업반 시절에는 스케이트부의 주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도 뛰어났으며, 대학 졸업 후에는 조선으로 귀국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朝鮮總督府 學務局)에 근무하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9
▲ 김정연의 학창 시절

 

광복 후 한국전쟁 때 고향의 전재산을 북한에 몰수당하여 빈털터리가 되는 불행도 겪었지만 대한체육회 상무이사,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대한빙상연맹 회장직을 역임하는 등 명예를 누렸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1
▲ 대한체육회 이사 시절

또한 1956년 동계올림픽에는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를 달고 선수단 총감독으로 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2. 이성덕(李聖德, 1911~1968)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3
▲ 이성덕의 출발자세 【동아일보 1936.2.11.】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 동아상업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5
▲ 이성덕의 질주하는 모습

 

중학시절부터 스케이트선수로 촉망을 받았으며 1932년 제4회 전일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우승, 1934년 전 일본 스피드스케이팅에서 2위로 입상함으로써 국제무대에 출전할 터전을 마련하였고 와세다대학 2학년 시절인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리-세이토쿠(りせいとく)라는 이름으로 참가하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7
▲ 이성덕의 올림픽 기록

 

일본 측 자료는 출생 연도가 1912년 1월 20일로 날짜까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사망연도는 불분명하다고 표기하고 있으며 ‘1980년대까지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
▲ 이성덕 별세기사 【경향신문 1968.7.9.】

 

하지만 경향신문이 이성덕씨의 별세를 보도함으로써 1968년 7월 8일 작고하였음이 확인되었다.

 

3. 장우식(張祐植, 1914~1971)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1
▲ 장우식의 출발자세 【동아일보 1936.2.11.】

 

신의주 출신으로 도쿄 메이쿄(名敎) 중학을 거쳐 메이지대 상과를 졸업하였다. 제4회 동계올림픽 일본 예선에 출전하여 10000m에서 2위를 차지했고 5,000m에서는 4위를 차지하며 보궐 선수로 대기하였다가 후원회의 출자나 사비로 참가비를 낸다는 조건으로 정식 선수로 편입되어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두 종목에 출전했는데 10000m에서 장우식 본인이 가진 기록 19분 28초 6 보다 28초나 단축한 19분 00초 1로 26위를 차지하며 투지를 발휘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3
▲ 장우식의 올림픽 기록

 

1936년 동계올림픽에 조-유소쿠(ちょう ゆうしょく)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장우식은 일본 측 자료에는 ‘신의주 출신’으로 명기되어 경기도라고 되어 있는 한국의 자료와는 차이가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5
▲ 장우식

 

사망연도는 한국 측 자료는 1971년으로 명확하게 되어 있는데, 일본 측 자료에는 카마 타다요시(鎌田忠良)라는 작가가 1988년에 출판한 『일장기와 마라톤』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도쿄에 거주 중인 장우식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바빠서 거절당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어 혼란을 준다. 하지만 직접 만난 것도 아닌 만큼 가족 측의 거절을 본인의 거절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제시대 선수들의 출생기록과 선수 시절의 자료는 아무래도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접수한 기록도 있는 만큼 일본 측의 기록이 더 정확할 테고, 광복 후의 기록은 한국의 자료가 더 정확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아쉬운 결과와 대회 후의 격려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지금도 스피드스케이팅 선진국과의 격차가 있는 만큼 당시에는 그 간격이 더 컸다. 하지만 멀리 유럽까지 가서 분투를 한 조선 청년들에게 언론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역(異域)에서 분투한 재독(在獨) 세 선수에게 조선일보 위무(慰務)의 전보 타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7
▲ 격려타전 【조선일보 1936.2.16.】

 

세계의 면전에서 오직 스포츠를 통하여 조선 남아의 기개를 키운 것을 발휘한 김정연, 리성덕, 장우식 3명은 지난 14일의 10000미터 경기로서 그들이 맡은 직책을 다하였고, 또한 불운을 느끼면서도 참된 운동 정신에 살자는 신념을 준수하며 정정당당히 싸워가며 올림픽 신기록을 작성한 빛나는 분투를 한 세 선수에게 본사에서는 그 노력을 감사한다는 치하의 전보를 남독일 올림픽 대회장인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전장으로 어제 15일 아침에 타전하였다.

 

“최선의 노력에 심심(深甚)한 사의(謝意)를 표함”


본사에서는 우리가 멀리 남독일 알프스 산록의 은반에 김, 이, 장 세 선수를 보내 제군들의 활약을 기대하였고 또 건투를 빌어왔으며 제군들이 출장하는 스피드스케이트가 열리는 지난 11일 새벽에 세 선수에게 잘 싸우라는 격려의 전보를 보내었거니와 어제 14일로 폐막을 고한 바 우리 세 선수의 4일간의 실력 이상의 분투노력과 여러 가지 불운과 싸워가며 당당하게 올림픽 신기록을 작성한 그 노력을 감사한다는 치하 전보를 15일 오전에 현장으로 띄웠다.

(아래는 발송한 전문)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세르호 올림픽 선수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 세명에게,
우리는 세 선수의 최선을 다한 노역에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 경성 동아일보사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9
▲ 격려타전 【동아일보 1936.2.16.】

 

이와 같은 격려 전보를 받아본 선수들은 사례의 답신으로 그동안의 후원과 응원을 감사하며 여정을 마무리 지었다. 비록 기대했던 이상의 기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올림픽에 참가한 빙상 트리오들은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일깨워주는 스타로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빙상선수 세 청년 본사에 사례의 답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시대의 스포츠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36년 제4회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던 조선인 최초의 동계올림픽 선수들은 입상 등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지 못해서 그런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31
▲ 격려에 대한 답신 【조선일보 1936.3.7.】

 

독일에서 빙상 조선의 영예를 위하여 분투한 김정연, 리성덕, 장우식 세명은 본사의 위전에 대하여 6일 아침 전지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으로부터 아래와 같이 답서를 보내왔다.

 

“우리 일행은 원대한 포부를 품고 올림픽 정도에 오른 지 벌써 한 달 반이 훨씬 넘는 동안에 노르웨이와 스위스를 거쳐서 대망의 올림픽 무대에까지 등장하였으나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하고도 오히려 나쁜 성적으로 마친 것은 우리를 지지하고 열렬히 응원하시던 고국 동포들을 대할 면목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계기로 앞날의 빙상 조선의 영예를 위하여 착실한 경험을 얻었다고 자위합니다.”

 

“이르는 곳마다 우리가 보낸 전적 보고는 모두 읽으셨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패부를 위로해주신 의미에서 보낸 귀사의 축전은 반갑고도 일면 비장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귀사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분에 넘치는 성원을 아끼지 않으신 동포형제에게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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