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의 딸 ③ 한창수의 손녀, 한연자
한창수(韓昌洙, 1862~1933)는 일제시대 남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역임했으며 이왕직 장관으로 덕혜옹주의 유학과 결혼 결정에 깊이 관여하기도 한 인물.
그는 한일병합 시에 이미 50대에 접어드는 나이라 딸보다는 손녀 한연자(韓延子, 1908~?)가 신문지상에 소개되었다. 한연자는 한창수의 장남 한상기(韓相琦)의 차녀로 본처가 아닌 외간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어서 할머니(한창수의 정실부인) 남양 홍씨의 손에 길러졌다.
▲ 한연자(韓延子)
– 영문과 음악의 천재
– 한창수 남작의 손녀
– 제2고여에 재학 중
여기 보이는 착 들어맞는 화복을 입은 작은아씨는 남작 한창수 씨의 둘째 손녀 한연자 양이올시다.
이왕직 찬시사장으로 오랫동안 봉직하다가 요새는 대비전하 전속으로 적적히 지내시는 전하를 끝까지 모시고 있는 한창수 남작의 장남 상기 씨의 둘째 따님으로 태어나서 할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싣고 방년 열여덟의 가을을 맞은 것이올시다.
연자 양은 방금 삼판통 제2고등여학교 5학년생으로 매일 학과 닦기에 여념이 없는바, 특히 타고난 천부의 재질은 어학과 음악 방면에 한량없이 발휘되어 피아노 잘 치기와 영어 잘하기로는 교내에 제일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나와서는 할아버님 앞에서 재롱을 부리며 쉬운 영어를 가르쳐드린다 하며 그뿐 아니라 원래 총명하고 학과에 열심하여 우등으로 진급하기도 벌써 여러 차례라 합니다.
학교 졸업하는 내년 4월에는 현해탄을 건너 동경의 무사시노(武藏野)에서 메지로여자대학(目白女子大学)영문과에 들어가 더욱 전문학식을 배우리라 하니 연자 양의 전도야 실로 넓고 양양한 것이외다. 학교에서는 피아노를 벗 삼아 그날을 보내고 집에 와서는 틈틈이 할아버지의 기르시는 화초에 심부름을 하는 연자 양의 일신이야말로 평화… 그것과 같습니다.
【매일신보 1926.11.06】
1926년경 18세였던 한연자는 경성 삼판통(三坂通, 현 후암동)에 있던 제2고등여학교(현 수도여고) 5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영어와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비록 정식 며느리의 손녀는 아니었지만 한상룡 가옥을 다룬 글에서 할머니 남양 홍씨가 한연자를 대동하고 방문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매우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 관련 글: 한상룡 가옥(백인제 가옥)에 모인 조선귀족부인들
▲ 가장 좌측의 여성이 한연자. 남성은 조부 한창수이다.
▲ 일본식 꽃꽂이 ‘이케바나(生け花)’를 배우고 있는 한연자
▲ 한창수 일가족. 복식과 신발까지 모두 일본식인 것을 볼 수 있다. 한연자는 결혼도 일본 남성과 일본식 혼례를 올렸다.
한연자의 결혼과 재산분쟁
22세가 된 한연자는 1931년 2월 21일, 13세 연상의 일본인 의사 오타 스게타카(太田資孝)와 결혼식을 올렸다.
▲ 한연자의 결혼식 모습
결혼 당시에 한창수가 오타 스게타카에게 ‘결혼 지참금 조로 유산을 상속해주겠다‘는 밀약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실제로 말년의 한창수는 부인과 한상기(韓相琦), 한상억(韓相億) 두 아들을 제치고 출가한 손녀 한연자에게 전재산을 주려다가 가족 간 재산분쟁에 휘말리기도 한 사건이 있었던 것을 보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분쟁 끝에 한창수는 전재산 30만 원 중 15만 원은 차남 한상억, 10만 원은 장남 한상기(약물 중독 등으로 인해 서자인 차남에게 밀렸다), 나머지 5만 원을 여러 사람에게 분배하기로 공증서를 작성하면서 한연자가 노렸던 유산상속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 한연자의 결혼식 단체 사진. 맨 오른쪽 앉아있는 부부가 한창수 내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