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2월 23일

조선귀족의 딸 ⑥ 민영린의 손녀, 민덕임

민영린(閔泳璘, 1873~1932)은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하사 받는 등 조선귀족으로 권세를 누린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

 

하지만 1917년 4월부터 9월까지 아편 흡입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으며 망신을 산 끝에 결국 작위까지 박탈당했다.

 

민영린(閔泳璘, 1873~1932)은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하사 받는 등 조선귀족으로 권세를 누린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 1
▲ 민영린(좌)과 가족들

 

결과적으로 다른 조선귀족들이 작위를 세습한 부자가 모두 친일인명리스트에 올라간 것과 달리, 그의 아들 민효식(閔孝植)은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면서 가문의 치욕은 민영린의 대에서 그치는 행운(?)을 누렸다.

 

또한 민영린의 죄로 인해 가문이 몰락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한 것도 아니었기에 민효식은 능참봉으로 왕릉을 관리하며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당시 발간된 신문기사 속에서 민효식의 딸, 즉 민영린의 손녀 민덕임이 소개되었다.

 

– 덕혜옹주의 학우
– 백작 민영린 씨의 손녀
– 숙명 학교에 재학 중

 

이번에는 백작 민영린(閔泳璘)씨의 손녀 따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름은 민덕임(閔德姙). 방년 17세의 꽃같은 작은 아씨이니 지금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3년급에 재학 중이올시다.

 

동대문밖 창신동에서 매일 불폐풍우(不蔽風雨)하고 학교에 다니는 그 지성은 그의 꽃다운 청춘을 거듭 빛나게 하니, 그야말로 학교에 나서면 우등생이요. 집에 돌아오면 양순한 작은아씨가 되는 터이올시다.

 

일찍이 창덕궁 복녕당 덕혜옹주의 어학우가 되어 귀중 궁궐에서 세상을 모르는 고귀한 생애를 누리다가, 옹주께서 히노데소학교(日出小學校, 일출소학교) 보통과 2년급으로 가셨었다.

 

민영린(閔泳璘, 1873~1932)은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하사 받는 등 조선귀족으로 권세를 누린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 3
▲ 유치원 시절의 민덕임

 

성적이 월등하여 연한을 채우기도 전에 3년급으로 월반까지 한 재주 있는 규수이니, 재상가 작은아씨 중에서는 드물게 부지런함이 있어 학과연습에 틈만 있으면 반드시 침방(針房)에 이르러 침모(針母)에게 침선(針線)을 배우기로 낙을 삼는다고 합니다.

 

아버님 민효식 씨는 故이왕 전하의 능소에 가서 계신 관계로 자연히 어린 동생들의 학과 복습은 덕임 양이 맡아서 시키게 되니, 동생 거느리는 범절이 놀라워 삼남매가 누구나 우수한 성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신여성 중에 현모양처가 드물다는 탄식이 있는 오늘날!

 

음악보다도 예술보다도 침선 공부와 어린 동생 거느리기를 재미를 심는 덕임 양의 영광스러운 장래야 실로 클 것이올시다. 요사이 때때로 글동무의 안부를 기리시는 덕혜옹주의 친필이 덕임 양에게 이르니, 덕임 양은 항상 일찍이 덕혜옹주를 뫼시고 함께 놀던 동무들의 소식을 시시로 옹주께 상달(上達)하기로 한즉 척을 삼는다고 합니다.

【매일신보 1926.11.09】


민영린(閔泳璘, 1873~1932)은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하사 받는 등 조선귀족으로 권세를 누린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 5

▲ 민덕임(閔德姙, 1910~?)


민덕임은 1926년경 당시 17세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현 숙명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어린 시절 고종이 궁내에 설립한 유치원에 덕혜옹주와 함께 다녔기 때문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옹주와 서신도 주고받는 상태였다고 한다.

 

민영린(閔泳璘, 1873~1932)은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하사 받는 등 조선귀족으로 권세를 누린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 7
▲ 1916년, 덕수궁 준명당에 설치된 유치원. 가운데가 덕혜옹주이고 민덕임은 좌측에서 두번째.


글을 쓴 기자는 기존의 현모양처상과 다른 ‘신여성’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지 민덕임에 대해 ‘다른 귀족 자제들과는 달리 침선(바느질)에 재미를 느끼는 덕임 양‘이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비록 민영린의 작위가 박탈되었으나 민덕임은 귀족 가문의 딸들만이 모이는 유치원을 다니고, 집안에 침방(針房)을 두고 바느질을 전담하는 침모(針母)들이 있었던 것으로 여전히 재력가 집안이었음을 기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덕혜옹주와 함께 재등장한 민덕임


일본 귀족과 정략결혼 후 조현병과 실어증에 시달리며 정신병원에 갇혀있던 덕혜옹주는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 김을한(金乙漢, 1905~1992) 기자 등의 노력으로 1962년 1월 26일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 관련 글: 덕혜옹주, 어린 시절부터 유학까지

 

이때 덕혜옹주의 유치원 동급생이었던 민덕임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바로 김을한이 그녀의 남편. 쉽지 않았던 덕혜옹주 귀국에 대한 노력을 김을한이 포기하지 않고 추진한 것은 아내 민덕임의 역할도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영린(閔泳璘, 1873~1932)은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하사 받는 등 조선귀족으로 권세를 누린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 9
▲ 영친왕 내외를 만난 김을한(가운데 서있는 남자). 오른쪽 끝에 앉은 여성이 민덕임

 

이후 민덕임은 1962년 6월 14일 이방자 여사가 귀국할 때에도 마중을 나가는 등 이왕가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녀의 정확한 사망 날짜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김을한 기자에 관한 글 중 ‘아내를 먼저 보내고 못내 그리워했다‘는 내용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1970~80년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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