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의 딸 ⑦ 윤치호의 딸, 윤문희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구한말의 교육자이자 외교관으로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당시로는 드물게 영어에 능통해 서구사회를 본질적으로 받아들여서인지 조선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노비를 해방시킨 인물로도 기록되어있고, 또 신랄하고 냉소적인 문구로 낙후된 조선사회와 조선인을 비판한 어록은 현재도 회자되고 있다.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구한말의 교육자이자 외교관으로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1
▲ 윤치호와 세번째 부인 마리아(백매려)

 

초기에는 일제의 협력을 거부하고 교육사업과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으나 일제의 지배가 길어지자 친일파로 변신해 적극 협력했던 인물로 오늘날 평가되고 있다.

 

셋째 딸 윤문희


윤치호는 슬하에 총 6남 9녀를 두었는데, 아홉 명의 딸들 중 윤보희(尹寶姬, 1923~2018) 전 이화여대 음대교수 외에는 크게 활동사항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부친을 쏙 빼닮은 얼굴의 셋째 딸 윤문희(尹文姬, 1909~?)가 윤치호 이상으로 유명인사의 삶을 살고 있었다.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구한말의 교육자이자 외교관으로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3
▲ 경성여고보 정구부. 뒷줄 오른쪽이 윤문희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현 경기여고)에 재학 중이었던 윤문희는 배구, 정구, 탁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는 ‘만능스포츠걸‘로 유명했다. 그
중에서도 일제시대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구기종목은 단연 연식정구(soft tennis)로 대회가 열리면 엄청난 인파가 몰려 관람객 입장을 제한할 정도였다.

 

대회가 끝나면 우승팀은 상품과 우승기를 실은 인력거를 앞세우고 그 뒤를 선수와 선생을 비롯한 전교생이 뒤를 따르며 떠들썩하게 퍼레이드를 벌였다. 지역 주민들이 엄청난 박수갈채를 보낸 것은 당연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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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을 앞둔 경성여고보 운동선수들. 앞줄 좌측에서 두번째가 윤문희

 

윤문희는 이 시기 경성여고보의 정구부장으로 여러 대회에서 모교의 우승을 이끌며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부친의 이름을 지워나갔다.

 

당시 신문들이 키가 크고 흰 얼굴이 특징인 윤문희를 두고 ‘대회를 앞두고 까맣게 타버렸다‘는 묘사를 하는 것을 통해 그녀가 열성적으로 운동에 집중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 여고(女高)의 교보(校寳), 윤문희 양
– 윤치호 씨의 셋째
– 이해와 존경의 생애

 

구한국시대에 내외에 이름을 떨치던 외교관으로 당대에 외무협관을 역임하였고, 지금까지 내외국 명사의 존경을 받으며 방금 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로 있는 윤치호 씨의 셋째 따님 윤문희 양을 소개하겠습니다.

 

문희 양은 꽃봉오리 같은 방년 17세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니, 위로 이해 깊은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아래로 우애 많은 동생들의 존경 속에서 가장 행복스러운 생애를 사는 것이올시다.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구한말의 교육자이자 외교관으로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7
▲ 윤문희


한 떨기 흰 백합과 같이 청정하고도 강건한 몸은 여자스포츠에도 그 이름이 높은 것이니,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정구부장으로 대회마다 출정하여 모교의 영광을 위해서 활약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실로 고보 중의 한 사람(최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옥수(玉手)에 라켓을 들고 나는 제비와 같이 뛰는 종달새와도 같이, 만신의 힘과 처녀의 순정으로 분투하는 양의 정신은 조선 여자운동계를 위하여 몹시 감사할 것이외다.

 

세상이야 소란하던지 인심이야 변천하던지 오직 행복과 평안이 흐르고 넘치는 따듯한 가정 속에서, 학과의 복습에 여념이 없고 때때로 옥같이 흰 라인이 둘러진 코트 위에 숙란(熟爛)한 정구를 하는 것밖에 모르는 깨끗한 처녀다운 생애만 사는 문희 양의 전도야말로 복 많고 행복이 길 것입니다.

【매일신보 1926.11.04】

 

법학자 정광현과 결혼 후 말년엔 도미


개화한 집안의 딸들만 운동선수를 할 수 있었던 시대, 정구선수로 이름을 날렸으나 어차피 실업리그나 프로팀이 없었기에 졸업과 동시에 여자선수들의 은퇴는 기정사실이었다.

 

윤문희는 훗날 ‘한국가족법의 개척자’로 불리는 동경제대 출신의 법학자 정광현(鄭光鉉, 1902~1980)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둔 가정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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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과 노년의 정광현


해방 후에는 대한여자정구협회의 임원도 역임하는 등 다시 활동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던 그녀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직한 남편 정광현이 지병으로 쓰러지자 치료를 위해 1971년 11월 26일, 자식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언론에 등장했다.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구한말의 교육자이자 외교관으로 조선인 최초의 영어 통역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11
▲ 윤치호 가족. 제일 오른쪽이 윤문희


정광현은 ‘아주 떠나는 게 아니다‘라며 찾아온 제자들의 출국인사도 받아주지 않는 등 귀국에 미련을 보이기도 했지만, 부인 윤문희가 시집올 때 혼수로 해왔던 은제옷장을 정리하고 소장도서를 기증하는 등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결국 미국으로 떠난 지 9년 만인 1980년 12월 17일에 별세하였다. 동행했던 윤문희의 생사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자식들이 있는 미국에 남아 여생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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