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의 딸 ⑪ 윤치소의 딸, 윤예경
윤치소(尹致昭, 1871~1944)는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력으로 친일인사로 분류된다.
역시 친일파로 분류되는 언론인 윤치호가 사촌 형이며, 윤치소의 동생은 대한민국 초대 내무부장관인 윤치영(尹致暎, 1898~1996)이고 장남은 4대 대통령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이다. 본인은 일제에 협력을 했지만 다음 세대는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가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윤치소, 이범숙 내외와 가족(1917년)
거물인 아들들에 비해 딸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지만 1926년 신문에 장녀 윤예경(尹禮卿)의 소개가 실렸다. 윤예경은 당시 21세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전문학교 음악과에 재학 중인 신여성이자 예술 유망주.
하지만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일본 가루이자와(輕井澤) 근교에서 피아노를 치며 요양 중이었는데, 단순히 유학이나 관광이 아닌 별장에서 장기체류하는 모습을 통해 당시 윤치소 가문의 재력을 짐작할 수 있다. 가루이자와는 현재도 일본에서 손꼽히는 휴양지이다.
– 양금(洋琴)은 천재(天才)
– 윤치소 씨의 영양으로 지금은 남국(南國)에 작객(作客) 중
안국동 8번지에 큼직한 솟을대문 달린 댁은 중추원 참의 윤치소(尹致昭)씨의 저택이니 윤씨의 맏따님 윤예경(尹禮卿)양을 소개하겠습니다.
예경 양은 꽃같은 방년이 20세로 어려서부터 아버님, 어머님 슬하에 귀엽게 길러져 일찍이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어 이화전문학교 피아노과에 입학하여 천래(天來)에 즐기는 음악의 세계에 모든 생활을 거는 것입니다.
▲ 윤예경(1905~2001)
상아건(象牙鍵, 피아노 건반) 나른한 곳에 윤양의 옥수가 움직일 때마다 처녀의 청정과 융화되어 나오는 유량(嚠喨)인 멜로디가 맑은 하늘에 굽이굽이 쳐 올라가는 것이요. 또한 이같은 도연한 예술의 나라에서 양은 일생을 바치리라는 이상과 포부를 가졌다 합니다.
근일에는 연약한 처녀의 몸에 건강을 상하여 따뜻한 남쪽나라로 피한할 곳을 찾아 경정택(輕井澤) 부근에 정양(靜養) 중이라 하니 반드시 고운 물결이 비단같이 접히고 갈매기 떼 지어 나는 그곳에서 한가히 몸을 피아노에 의지하고 한 곡조 망향곡을 풀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이 멀다 하고 사랑하는 아버님 전과 어머님 전에 순정이 넘치는 문안의 상서(上書)가 그치지 아니하니, 오! 예술과 사랑 가운데서 곱게 자라는 예경 양의 이상이야말로 같이 축복할 것이올시다.
【매일신보 1926.11.02】
늦은 결혼과 납북된 남편
윤예경은 신여성답게 결혼에 대한 생각보다는 이화여전에 적을 두고 20대 중반까지 매일같이 피아노 연습에만 매진 중이었다.
1920년대의 결혼연령을 생각해보면 20대 중반은 늦은 나이였다. 결국 명문가의 장녀로서 부모가 정해주는 결혼을 피할 수 없었고, 1929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재학 중인 연하남 이능섭(李能燮, 1907~?)과 식을 올렸다.
▲ 이능섭, 윤예경 부부 결혼식
두 사람 다 학생신분이었지만 윤치소 가문이 워낙 부자였기에 신혼살림은 친정에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곧 아이가 태어남에 따라 윤예경은 갑작스럽게 피아노만 치던 규수에서 1930년대 초에는 아기엄마로 바쁜 나날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 윤치소 가족. 뒷줄 기둥 앞이 윤예경(1930년)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33년 3월 11일 오전 10시 반, 정동예배당(현 정동제일교회)에서 이화여전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윤예경은 음악과 10명의 졸업생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 1933년 이화여전 졸업식
부부는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학업을 놓지 않고 졸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재력이 넘치는 부모의 후원 덕분이었을 것이다.
▲ 졸업식의 윤예경
하지만 해방 이후 발발한 6.25 전쟁으로 남편 이능섭이 납북되면서 윤예경은 생의 가장 큰 굴곡을 맞이하였다. 이능섭의 생사는 알 수 없지만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관리이자 경찰로 활동한 이력 때문에 생존했더라도 순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월이 흘러 1960년에는 오빠 윤보선이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으로 확정되면서 안국동 사저에서 촬영한 가족기념사진 속에 윤예경의 모습이 함께 담겨있다.
▲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 사저의 가족들. 붉은 화살표가 윤예경(1960년)
젊은 시절 학업을 자주 중단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윤예경은 2001년 96세로 타계하며 의외로 형제들 중 가장 장수하였다. 어쩌면 납북된 남편과의 재회에 대한 희망이 삶의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