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의 딸 ⑫ 이진호의 딸, 이옥자

이진호(李軫鎬, 1867~1946)는 아관파천 당시에는 일본 측에 붙었다가 친일내각이 무너지면서 망명해야 했지만, 대한제국 군대해산 직후 10년 만에 귀국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화려한 꽃길을 걸었다.

 

특히 일제 말기에는 그를 비롯한 한상룡, 윤치호 등의 유력인사들이 간담회를 열고 명문가에서 솔선수범해서 전쟁 지원병을 내도록 적극 권장하는 활동을 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이진호(李軫鎬, 1867~1946)는 아관파천 당시에는 일본 측에 붙었다가 친일내각이 무너지면서 망명해야 했지만, 대한제국 군대해산 직후 10년 만에 귀국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화려한 꽃길을 걸었다. 1
▲ 이진호

 

1926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오르면서 권세를 떨쳤는데, 이 기간 그의 막내딸, 이옥자(李玉子)가 신문지상에 소개되었다.

 

이옥자는 당시 13세로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며, 계산을 해보면 이진호의 나이 40대 중반에 본, 당시로서는 아주 늦둥이라 몹시 귀여움을 받은 듯하다.

 

오늘 소개할 작은아씨는 학무국장 이진호(李軫鎬)씨의 영양 이옥자(李玉子)양이올시다.

 

이 작은아씨는 금년 13세로 시내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에 다니는 중이니, 이미 형설의 고흔(깊은) 공로가 헛되지 아니하여 명년 봄에는 졸업을 하게 됩니다.

 

날마다 날마다 조선사람이 드문 서소문정 관사 부락에서 아침이면 책보를 받쳐 들고, 고요히 걸음을 걸어 배재학당 고개를 넘는 아담한 규수가 있으니 그는 곧 우리 영민한 이옥자 양이올시다.

 

학교에서도 매우 너그러운 덕성이 있어서 상급생의 도리를 철저히 지킨다고 하며, 특히 운동과 예술 방면에 취미가 깊어서 아담한 처녀의 태가 빛나는 중에도 스포츠의 경쾌 강렬한 특징이 잠들어 실로 강유를 겸비한 작은 아씨라고 하겠습니다.

 

이진호(李軫鎬, 1867~1946)는 아관파천 당시에는 일본 측에 붙었다가 친일내각이 무너지면서 망명해야 했지만, 대한제국 군대해산 직후 10년 만에 귀국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화려한 꽃길을 걸었다. 3
▲ 이진호의 막내딸, 이옥자

 

월전(月前) 조선인 성악가 김문보(金文輔)씨 부처가 본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음악회를 개최하였을 때에도 옥자 양은 휴기(休氣)가 무르녹은 꽃가지를 섬섬옥수에 받쳐 들어 만장 박수 중에 무대에 선 김문보 부인에게 선사한 일도 있습니다.

 

그때에 모인 신사숙녀들 중에서도 “참 잘도 생겼다”하는 부인도 있었으며, “저 규수가 학무국장의 딸이래”라는 분도 있어 그 귀엽게도 자라난 자태는 영롱한 청춘시대를 누구나 축복하게 하였습니다.

 

학교에서만 돌아오면 관사 일실(一室)에서 복습을 하다가 자동차 소리만 나면 “아버님이 오신다!”고 앞장서서 뛰어나가 반드시 모자를 받아드리니, 종일토록 관공사에 피로한 이국장의 머리도 평화의 신 같은 옥자 양의 반가운 낯만 대하면 눈 쓸듯하여버릴 것이올시다.

【매일신보 1926.11.03】


위 기사에 나온 김문보(金文輔)는 한국 최초의 바리톤으로 일본인 여성 성악가인 요시즈 나오코(吉津直子)와 결혼하면서 유명세를 얻은 ‘조일(朝日)커플’이었다.

 

이진호(李軫鎬, 1867~1946)는 아관파천 당시에는 일본 측에 붙었다가 친일내각이 무너지면서 망명해야 했지만, 대한제국 군대해산 직후 10년 만에 귀국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화려한 꽃길을 걸었다. 5
▲ 김문보 내외의 귀국 독창회


부부는 결혼 직후인 1926년 9월 7일 오후 8시 매일신보 내청각에서 명사 500명을 초청해 독창회를 개최하였는데, 초청된 이들의 면면은 조선총독부 총독부인과 정무총감 부인을 비롯해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 한성은행 두취 한상룡,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 등으로 화려했다.

 

이진호(李軫鎬, 1867~1946)는 아관파천 당시에는 일본 측에 붙었다가 친일내각이 무너지면서 망명해야 했지만, 대한제국 군대해산 직후 10년 만에 귀국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화려한 꽃길을 걸었다. 7
▲ 수염이 없는 이진호의 모습

 

공연 시작 전에는 명사들의 자녀 3명(일본인 자녀 2명, 조선인 자녀 1명)이 무대 위로 올라가 꽃다발을 선사했는데, 이중에 이진호의 딸 이옥자가 있었다. 이 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진호의 가계도는 그 위상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진호(李軫鎬, 1867~1946)는 아관파천 당시에는 일본 측에 붙었다가 친일내각이 무너지면서 망명해야 했지만, 대한제국 군대해산 직후 10년 만에 귀국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화려한 꽃길을 걸었다. 9
▲ 1928년 여자정구대회에서 시구를 하는 이진호의 아내 이씨 부인. 1934년 11월 4일 별세했다.

 

혹시 사고나 6.25 전쟁으로 인해 대가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닌가 싶지만, 최근에도 후손들에 의해 한국 정부와 토지소송이 오가는 대표적인 가문이다.

 

이진호(李軫鎬, 1867~1946)는 아관파천 당시에는 일본 측에 붙었다가 친일내각이 무너지면서 망명해야 했지만, 대한제국 군대해산 직후 10년 만에 귀국하여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화려한 꽃길을 걸었다. 11
▲ 정부를 상대로 토지반환소송에서 승소한 이진호의 후손


가족에 대한 언급을 일부러 하지 않았거나 사고로 인해 딸들만 생존했거나(1918년경 아들이 아프다는 기사가 존재한다) 하는 이유로 자료가 많이 남지 않은 듯하다. 소개된
 딸 이옥자 역시 매일신보의 기사와 김문보 부부에게 꽃다발을 준 어린 시절 이후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삶을 살았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