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5월 11일, 왕세손 ‘이진 왕자’의 죽음
1922년 4월 26일, 영친왕 이은과 왕비 이방자는 생후 8개월 된 왕세손 이진(李晋)을 데리고 경성역에 도착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처음으로 순종과 이왕비(순정효황후)에게 인사를 올리고, 5월 9일 오전 10시 50분 경성을 떠나 5월 11일 동경으로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 경성역에 도착한 영친왕 내외. 이진은 유모(中山)에게 안겨있다.(1922.04.26)
갑자기 상태가 나빠진 이진
그런데 귀국 하루 전날인 5월 8일, 이진은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부터 동행한 전의(典醫) 고야마(小山)는 이진 왕자가 아침부터 설사와 구토에 시달리는 등 ‘우유를 잘못 먹어 급성 소화불량을 일으킨 것 같다‘며 치료에 2~3일 정도 걸릴 것으로 진단했다.
▲ 오전 8시, 위로차 석조전을 방문한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조선총독과 그의 부인 (1922.05.09)
이진은 5월 10일 오후 9시까지도 크게 위급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지만, 용태를 전해 들은 다나카마루 지헤이(田中丸治平) 총독부병원장은 맥박수는 150, 호흡수는 40이라면 ‘양호한 상태라고 할 수는 없다‘고 추정했다.
이를 통해 왕실의 일을 최대한 밖으로 말하기를 삼갔을 뿐, 실은 매우 위중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오전 11시, 석조전을 방문하는 순종과 순정효황후 (1922.05.11)
혼혈왕자의 허무한 요절
이후 차도가 없었던 이진은 5월 11일 오후 3시 12분경, 머물고 있던 덕수궁 석조전에서 부모인 영친왕과 이방자 내외를 비롯해 시가(志賀)원장, 고노(河野)박사, 고야마(小山)전의등 의료진들과 고희경(高羲敬, 1873~1934) 백작이 지켜보는 가운데 허무하게 사망했다. 태어난 지 1년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모친인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는 이진의 사망시각을 ’11일 새벽 3시 15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 언론들은 모두 ‘오후 3시 12분‘으로 말하고 있다. ‘아무래도 엄마의 기억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오히려 경황이 더 없었을 수도 있다. 특히 당시 기사들은 매시간의 진료기록을 함께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훙거 전(薨去 前)의 어 병세(御 病勢)
– 오후 2시 반에는 극히 미약
이진 전하의 병세는 8일 아침부터 11일 오후까지는 조금도 차효(差效)가 없이 10일 밤 10시부터 11일 새벽 3시까지 수면을 하셨으나, 잠을 깨신 후는 10일보다 오히려 쇠약하셨다.
11일 아침 9시에 체온은 36.5도로 내리었으나 10시에는 38.9도로 수약(水藥)과 맥탕(麥湯)을 잡수셨을 뿐임으로 ‘가니풀’ 주사와 식염수 피하주사와 국당(菊糖)용액의 완장(浣腸)을 시험하였으나 호흡이 70으로 급해지고 맥은 아주 유미(幽微)하사 입과 손끝에는 ‘지아이제’가 생기면서 안구는 힘이 없어지더니 오후 2시 반에 심기가 극히 미약하자 ‘지아이제’는 점점 심하면서 호흡이 끊어지시고 오후 3시 12분에 훙거하셨다더라.
【매일신보 1922.05.13】
왕족의 사망시각은 발표 시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위와 같이 진료기록이 상세하게 나와있을 뿐만 아니라 순종이 11일 오전 11시에 순정효황후와 함께 석조전에 병문안을 가기도 했기 때문에 새벽 3시 15분 사망은 시간상으로 맞지 않다.(위 사진 참조)
그러므로 이방자 여사가 큰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기억에 혼동을 겪었거나, 회고록 집필이나 편집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이진의 모습. 오른쪽은 한복을 갖춰입고 촬영하였다.
갓난아기 이진의 돌연사는 공식적으로는 급성소화불량이지만 지금까지도 일제의 소행, 혹은 혼혈 후계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조선왕실의 독살이라는 상반된 주장이 오고 가고 있다.
이진과 가장 깊은 관계인 모친 이방자는 조선방문 2주일간 피곤한 빛도 없이 건강했던 아기가 하필 출국 하루 전에 사망했다는 점에서 왕실의 누군가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믿음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 덕수궁 석조전에서 함유재로 시종들이 이진의 시신을 옮기고 있다. (1922.05.12)
순종, 이진의 장례식을 허하다
어린 왕세손의 죽음은 이례적인 배려를 이끌어냈다. 조선에서는 아기의 죽음은 장례를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지만, 순종은 일본여성이었던 이방자가 안타까웠는지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첫 아이를 잃은 영친왕 내외는 당연하게도 큰 충격을 받았으며, 부부는 정결한 짚자리 위에 우이중(羽二重, 어린이용 단속곳)을 입은 이진을 뉘어놓고 석조전 2층에서 밤을 꼬박 새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진의 유해는 다음날 덕수궁 함유재(咸有齋)로 옮겨졌는데, 임시로 가마를 만들어서 흰 비단으로 싼 둥근 관에 뉘어서 윤세용(尹世鏞) 사무관의 전도로 일곱 명이 들고 그 뒤로 이항구(李恒九) 이왕직예식과장 및 친척 귀족이 뒤를 따랐다.
▲ 5월 16일 오전 10시, 다이쇼 천황(大正天皇)내외가 보낸 어사(왼쪽)와 황태자(아키히토)가 보낸 어사가 창덕궁 희정당에서 참배하는 모습.
12일 오후 5시에는 이지용(李址鎔) 백작이 목욕재계한 다음 여덟 가지 비단으로 친왕복(親王服)을 입혀 소렴(小斂, 수의를 입히는 일)을 하였고, 13일 오후 1시에 대렴(大殮, 소렴 다음날 시신을 베로 감싸 매듭을 짓는 것)을 하였다.
관의 바닥에는 흰 비단을 깔고 유해도 흰 비단으로 싼 후 마지막은 베로 감싼 다음 매듭을 짓고 일상복을 관속에 넣고 관뚜껑을 닫았으며, 평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별도로 제작된 곽에 담아 주었다.
▲ 먼 발치에서 전별하는 영친왕과 이방자
발인은 17일 오전 10시에 시작되었다.
이진의 관을 봉안한 대여(大輿)는 10시 10분 대한문을 나와서 황금정 2정목으로부터 종로 네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돌아 종로 2,3,4정목을 지나 동대문 밖으로 나간 다음, 경춘대로를 통하여 청량리 경찰관 주재소의 왼편으로 들어가 묘소로 결정된 청량리 영휘원(永徽園)으로 입장해 미리 배치되어 있던 외관에 입관을 넣고 뚜껑을 닫았다.(이진의 관은 두 겹으로 제작되었다)
▲ 영휘원과 이진의 무덤 숭인원(崇仁園) ⓒNavermap
영휘원은 이진 왕자가 생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할머니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1911)의 묘소였다.
▲ 대한문을 나서는 이진의 상여
당시 대한문 앞에는 ‘계림팔도(鷄林八道)’를 테마로 만든 청홍빛의 전등장식을 한 화려한 전식탑(電飾塔)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는 4월 26일 귀국하는 영친왕 가족을 환영하기 위해 경성부청에서 건설한 것이었다.
▲ 영친왕 내외를 환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식탑
하지만 불과 2주 만에 장례행렬이 대한문을 나가는 불운한 일이 발생하면서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던 이 화려한 탑은 철거되었다. 또 남대문역(경성역)에 있던 ‘봉영문(奉迎門)’의 글자도 ‘봉송문(奉送門)’으로 바꾸어서 영친왕 내외를 위로하였다.
▲ 부산세관 제1부두에 정박한 경복환. 경복궁의 이름을 따 명명된 배였다.
장례식이 끝난 후 영친왕 내외는 18일 오후 8시 30분 남대문역(경성역)에서 출발해 19일 오전 6시 30분에 부산에 도착한 후 관부연락선 경복환(케이후쿠마루, 景福丸)을 타고 출국했다. 이는 경복환의 첫 취항으로, 죽음을 겪은 사람들이 생을 막 시작하는 배에 올라탄 묘한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