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 집터(조계사)에 얽힌 역사
서울 종로구 견지동 27-2.
이곳에는 조계사와 우정총국이 위치해 있고, 그 앞을 지나는 우정국로에는 ‘민영환 집터’라는 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 조계사 앞 우정국로 ‘민영환 집터’ 표시석
1905년 11월 17일, 일제와 을사조약을 체결한 얼마 후인 11월 30일에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살던 큰 기와집이 바로 현재의 조계사 경내에 있었다.
당시 민영환은 자택이 아닌 의관(醫官) 이완식(李完植)의 집(현 인사동 하나빌딩)에서 죽음을 택하였다. 서거 이후 그의 유품이었던 피 묻은 옷과 칼을 자택의 뒷방에 보관하였는데, 이듬해에 그 방의 마루를 뚫고 대나무(血竹, 혈죽)가 자라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 혈죽의 당시 모습과 민영환의 부인 박수영 여사가 보관해 온 현재의 모습 ⓒ고려대박물관
그렇다면 이 터가 민영환의 집이 되기 전에는 누구의 소유였을까.
이전의 집주인은 조선 23대 왕인 순조(純祖)의 장인이었던 영안부원군 김조순(永安府院君 金祖淳, 1765~1832)이었다.
조선의 실권을 잡고 세도정치를 하던 그의 시대에 이 저택에는 평교자(平轎子), 사인교(四人轎)등의 가마가 끊이지 않았고, 팔도에서 들어온 산더미 같은 봉물(封物)들이 매일 들락거렸다.
▲ 김조순 초상화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안동 김씨의 시대가 끝나고 고종(高宗)이 세자 책봉을 한 이후에는 민씨의 시대가 시작되며 이 저택도 좋은 시절을 마감할 것 같았으나, 명성황후 민씨의 먼 친척인 민영환이 이곳을 차지하면서 번화의 시대를 이어갔다.
▲ 민영환 집터 위치
하지만 그 번영의 시대도 민영환의 죽음으로 종말을 고했고, 마루를 뚫고 올라온 혈죽을 보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엄청난 인파가 모여든 것이 마지막이었다.
주인을 잃은 이 저택은 상업은행 두취(頭取, 은행장)였던 조진태(趙鎭泰, 1853~1933)가 잠깐 소유하기도 했으나 이후에는 조선식산은행에 넘어가며 비워지게 되었다.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1930년대에 들어서며 이곳은 폐가처럼 변해갔다.
▲ 1930년대 초의 모습
권력자들의 화려한 가마와 자동차 대신 도심 주변을 떠도는 걸인과 빈민들이 이곳을 찾아왔으며, 화려한 장식물들로 가득했었을 내부는 안채와 사랑채 할 것 없이 봉지쌀(쌀자루)과 땔감으로 쓸 나무들이 여기저기 가득 쌓여있는 빈민굴로 전락해 있었다.
이후 1938년 10월에는 태고사(太古寺, 1955년 조계사로 개칭)를 준공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현재의 조계사 경내
권력의 정점에서 빈민굴을 거쳐 현재는 불교 사찰이 되었으니 용도는 달라져왔지만 어쨌든 이곳은 수백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풍경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