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의 교통사고 모습과 현황

1910년대 초반만 해도 조선에서 찾아보기 힘들던 자동차는 1910년대 중후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

 

전통을 고수해오던 대한제국 황실도 1917년에는 마차를 폐지하면서 완전히 자동차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 관련 글: 대한제국 황실 최후의 마부

 

1910년대 초반만 해도 조선에서 찾아보기 힘들던 자동차는 1910년대 중후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 1
▲ 1915년,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캐딜락 리무진. 국내 최초의 자가용으로 알려져 있다.

 

자동차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교통사고.

 

이 시기 경기도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 관내에 소속된 차량은 22대였는데 1916년 한 해 동안의 사고를 보면,

• 절벽에서 추락한 것이 1건
• 자전거와 충돌한 것이 1건
• 사람을 치인 것이 20건이었다.

( 택시 등 영업용 차량만을 계산한 것으로, 자가용을 추가하면 사고건수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차량이 적다 보니 사고가 적을 뿐, 차 22대에 사고가 22건이면 자동차 한 대당 일 년에 한 번은 사고를 일으킨 셈이다.


당시는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도로가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고, 운전수의 떨어지는 숙련도에 생소한 좌측통행 규칙 등을 지키지 않는 보행자들의 부주의함이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 2021년 한 해 동안 발생한 교통사고는 209,654건.

이는 시간당으로 계산하면 24건으로 현재 한 시간 동안 발생하는 교통사고가 1916년 한 해 동안 발생했던 사고수보다 더 많다.(2021년 자동차 등록대수 2,470만 대)

 

1920년대, 급증한 자동차사고


자동차 수가 적다 보니 한 달에 1~2건에 불과하던 교통사고는 차량 증가에 따라 1920년대에 급증했다.

 

1922년 경기도 관내에서 발생한 자동차사고는 44건으로 1916년에 비해 두배 가까이 증가했고, 이 수치는 1923년 84건으로 교통사고 증가수는 자동차 속도만큼 빨라졌다. 이 시기 경기도 내의 자가용은 92대, 영업용 차량은 156대로 차량 한 대당 사고는 여전히 많은 편이었다.(1923년 1월 기준)

 

1927년 경기도 관내 교통사고는 총 700건으로 이중 자동차에 의한 사고가 229건이었으며, 사망자도 9명이나 발생하면서 전차 사망자수 4명을 넘어서며 ‘조금 빠른 마차‘정도로 인식되던 자동차는 이제는 도로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1929년에 이르면 조선 전역의 자동차사고는 2,332건으로 사망 96명, 부상 1606명에 달하게 된다. 현재의 교통사고 건수나 사망자수에 비하면 현저히 적은 숫자였지만 당시 언론은 ‘스피드 시대의 부산물로 발생하는 폐해‘라며 연일 증가하는 자동차사고에 우려를 표시했다.

 

자동차 사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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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4월 28일 오후 6시 20분, 이종세(26)라는 운전수가 남산정에 있는 화월별장(花月別莊)이라는 요정에서 일본손님 1명과 일본기생 3명을 태워 동대문밖 연수각을 향해 가던 중, 영도사 입구에서 마주오는 짐마차를 피하려다가 둑이 무너지고 자동차 뒷바퀴가 빠지면서 전복된 사고.

 

당시 기생 한 명이 얼굴에 부상을 입었으며 흔치 않은 자동차 전복사고라 구경꾼들이 잔뜩 몰려든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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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11월 19일 오전 4시 50분경, 종로 자동차부의 운전수 최현기(24)가 동대문에서 종로통을 향해 질주하다가 종로 삼정목 94번지 앞 지점에 있는 전신주에 충돌하여 전신주는 부러지고 자동차는 전면이 손상되었다.

 

전날 비가 와서 도로가 진창이 된 데다가 야간에 과속을 하던 중 뛰어든 사람을 피하려다 발생한 사고. 재산피해액은 전신주가 100원, 자동차가 약 200원이었고 운전수 최현기는 앞유리 파손으로 얼굴 등에 부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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