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인파로 붐비는 경성(서울)

1940년 6월 1일, 월간지 가데이노도모(家庭の友) 32호에서는 사람의 홍수로 붐비는 서울(경성)의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사진 설명 속에는 도시집중현상이 일어나 서울이 펄펄 끓는 도시가 되었으며, 여기에 더해 사쿠라(벚꽃)철이나 전람회 등에 사람들이 돈을 펑펑 쓰는 모습을 ‘악습’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는 백만 명에 근접함에 따라 기차역, 백화점, 유원지, 극장, 운동장, 주점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넘쳤고, 입장권이 필요한 곳이라면 줄이 길게 늘어서서 돈을 주고도 못 들어가는 광경이 소개되었다.

 

창경원(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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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원 벚꽃구경을 하는 인파


일제시대 창경원에는 수천 그루의 벚꽃이 심어져 방문객들로 넘쳐났다. 특히 1918년부터 매년 봄철(3월~4월)이면 휴무없이 야간에도 개장을 해서 서울 사람은 물론이고 지방에서 자동차를 타고 상경하였다.

 

사진 속에서 일본의 기모노, 조선의 한복, 당시의 교복을 입은 학생, 양복과 갓을 쓴 사람이 혼재하는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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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원의 벚꽃놀이 ⓒ서울역사박물관

 

위의 두 사진 모두 창경원의 옥천교(玉川橋)를 건너는 사람들을 담은 모습으로 야간 관람을 위해 옥천교 옆에 등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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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교 현재 모습 ⓒ문화재청


해방 후에도 벚꽃놀이는 성행하다가 1963년 옥천교는 보물 제386호로 지정되었고, 1984년 창경궁복원사업이 시행되면서 벚나무는 제거되고 창경궁으로 다시 돌아갔다.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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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앞의 인파


당시 서울시내 극장의 하루 수용가능인원은 3만 5천 명이었는데도 엄청난 인파가 표를 사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다.

 

해당 건물은 정문 위에 적혀있는 대로 ‘명치좌(明治座, 메이지자)라는 곳으로 현재도 명동예술극장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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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전당, 명치좌(1938.06) ⓒ서울역사박물관


명치좌는 1936년 10월 7일 준공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국제극장(1946)-시공관(1947)-명동예술회관(1957)으로 개칭을 거쳤다. 1973년에는 폐관하였다가 2009년 6월 5일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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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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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와 현재 비교. 글자를 제외한 외관은 그대로 남아있다.

 

명치좌는 1930년 12월에 개축 준공한 일본 도쿄 아사쿠사의 유명 극장인 다이쇼칸(大勝館)의 설계를 그대로 가져다 만든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정작 다이쇼칸은 1971년 폐업하였으며 건물은 2012년 철거되었다.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돈키호테 아사쿠사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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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쇼칸(1935)

 

전차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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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차를 타는 사람들


정류장에 도착한 전차에 타기 위해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몰려드는 모습이다. 엄청난 인파에 ‘체면 차리고 있으면 전차를 타기 힘들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차 내부는 당연히 콩나물시루와 같은 만원이었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 모여있음에 따라 오히려 전차 예절을 지키자는 등 개인의 영역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관련 글: 황신덕의 전차예절 칼럼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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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화점의 신여성들


백화점이 사람들로 붐비는 모습.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화장품이나 장신구 코너로 보인다. 해당 사진 아래에는 ‘전쟁 때문에 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도 헛소리’라며 사치품을 사기 위해 백화점이 고객의 물결로 항상 넘쳐나고 있다며 비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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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츠코시(三越) 백화점 ⓒ서울역사박물관

 

1940년 당시 경성에는 조선반도 최초의 백화점 미츠코시(三越)백화점을 비롯해 히라타(平田)백화점, 조지야(丁子屋)백화점,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동아백화점, 화신백화점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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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세계백화점 본점 | 2021.04

 

이 중 1906년 경성에 출장소를 냈던 미츠코시는 1930년 10월 24일 충무로 지역에 건물을 건립했다. 해방 후 동화백화점으로 운영하다가 1963년 삼성그룹이 인수하였고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로 현존하고 있다.

 

부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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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민관의 남녀노소

 

부민관도 빈자리 하나 없이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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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부민관 ⓒ서울역사박물관


1935년 12월 10일 태평로에 완공된 경성 부민관(京城府民館)은 극장 및 강연 등을 할 수 있었던 장소로, 해방 후에는 국회의사당을 거쳐 세종문화회관 별관이었다가 현재는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2년부터는 국가등록문화재 제11호로 등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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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의회(구 부민관) | 2021.04

 

경성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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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운동장의 야구관중


1940년에도 매일 운동경기는 열리고 사람들은 몰리고 있었다. 위 사진은 야구경기가 열리고 있는 경성운동장(京城運動場, 경성 그라운드)의 모습. 당시 아시아 최대의 경기장으로 25,800명이 수용인원이었다.

 

경성운동장은 1925년 10월 15일, 일본 히로히토 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해 건립되어 ‘동궁전하어성혼기념 경성운동장(東宮殿下御成婚記念 京城運動場)’이 정식 명칭이었다. 정면에 보이는 철제 지붕이 있는 중앙석은 1926년 12월에 설치되었는데, 1943년 2월 전쟁물자로 공출하기 위해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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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2월 18일 철거 시작

 

경성운동장은 해방 후에는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잠실운동장이 생긴 후에는 동대문운동장으로 변경하였다가 2007년 철거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경성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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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역 대합실

 

경성역도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1940년 4월의 경성역 이용객은 99만 명으로 하루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타고 내린 셈이었다. 이는 현재 동대구역과 부산역의 이용객 수에도 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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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주요역 별 이용객수 ⓒ철도경제신문


1928년에는 경부선(京釜線), 경의선(京義線), 경원선(京元線), 호남선(湖南線), 함경선(咸鏡線)의 5대 간선철도가 완성되었고, 이후 ‘조선철도 12년 계획’에 돌입해 1938년에는 경전선과 동해선의 일부를 제외하면 계획은 완수되었다.

 

■ 관련 글: 일제시대, 외금강역 역사의 모습

 

위 사진이 찍힌 1940년이면 한반도는 철도망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되었고, 행락철이 되면 경성에서 금강산으로 단풍놀이를 떠나는 일행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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