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2월 23일

1980년, 2차 오일쇼크가 불러온 ‘디딜방아’의 부활

1978년, OPEC 회원국들이 원유 가격을 급격하게 인상한 데다가 당시 세계 석유시장의 15%를 차지하고 있던 이란에서 혁명으로 인한 파업이 발생하자 세계는 제2차 오일쇼크에 돌입했다.


전 세계의 경제성장률은 예상치보다 줄어들었고 물가상승률은 급격하게 높아졌다.
특히 국내의 불안한 정치상황으로 제대로 대비를 하지 못한 한국은 1차 오일쇼크 때의 충격 때문인지 2차 오일쇼크의 심리적 불안감은 더욱 컸고, 이는 가정경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78년, OPEC 회원국들이 원유 가격을 급격하게 인상한 데다가 당시 세계 석유시장의 15%를 차지하고 있던 이란에서 혁명으로 인한 파업이 발생하자 세계는 제2차 오일쇼크에 돌입했다. 1
▲ 휴일을 맞아 커버를 씌우고 문을 닫은 주유소. 이로 인해 휘발유 암매, 가정 비축등 부작용이 잇따랐다. 【매일경제 1979.06.26】

 

도시에서는 1차 오일쇼크 때의 일본처럼 생필품 사재기(관련 글: 일본의 화장지 소동)가 극성을 이루었고, 정부는 에너지 절약 정책으로 보일러 가동시간 단축, 초중고의 방학연장, 승용차 공휴일 운행금지 등을 실행하며 에너지 재난의 파고를 넘어야 했다.

 

1978년, OPEC 회원국들이 원유 가격을 급격하게 인상한 데다가 당시 세계 석유시장의 15%를 차지하고 있던 이란에서 혁명으로 인한 파업이 발생하자 세계는 제2차 오일쇼크에 돌입했다. 3
▲ 석유를 사기위해 주유소에 늘어선 주부들 【경향신문 1979.07.04】


1980년의 한국경제는 -5.2%의 성장률로 후퇴하며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이는 석유 수입원을 다변화하고 해외 에너지 개발에 투자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원자력과 수력발전 등의 대체에너지 개발에 더욱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아래는 1980년 오일쇼크가 한 농촌에서 버려진 디딜방아를 소환해낸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문명을 산업혁명 전으로 돌려버린 석유파동

 

– 유가 바람에 재등장한 디딜방아
– “에라, 문명도 싫다”
– 기름난에 읍내 방앗간 휴업
– “일손 많이 들지만 속 편해요”


이제 전설처럼 기억에서 사라져 간 디딜방아가 다시 등장, 에너지 위기와 드높은 유가 파고를 헤쳐가고 있다.
방앗간의 요란한 모터 소리 대신 ‘쿵덕쿵덕’ 어쩌면 40~50년 전으로 되돌아간듯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디딜방아의 등장은 비전 없는 정부의 물가정책에 대한 순박한 농민들의 소리 없는 저항인지도 모른다.

 

비록 방아를 찧는 고역을 치러야 하지만 기름 한 방울 들지 않아 유가 파고가 아랑곳없는 디딜방아가 등장한 곳은 충남 논산군 두마면 백암리 부남 마을. 마을 입구에 위치한 채 1백 년 동안 보존돼온 이 마을의 디딜방아는 이제 60여 가구 340여 명의 마을 주민에게 없어서는 안 될 보물 1호로 부상했다.

 

1978년, OPEC 회원국들이 원유 가격을 급격하게 인상한 데다가 당시 세계 석유시장의 15%를 차지하고 있던 이란에서 혁명으로 인한 파업이 발생하자 세계는 제2차 오일쇼크에 돌입했다. 5
▲ 부활한 ‘1881년산’ 디딜방아


조상들의 땀과 체취가 밴 이 디딜방아가 다시 마을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0여 일 전부터. 마을에서 1km쯤 떨어진 동력 방앗간이 석유값 인상 직전 경유를 구하지 못해 발동기를 돌리지 못하자 곡식을 찧지 못해 그동안 버려두었던 디딜방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동력 방앗간은 기름값 인상후 가동은 했지만 떡쌀 1말을 빻는데 그 삯이 1천 원으로 쌀값의 5%인 데다 앞으로 또 도정료가 얼마나 더 오를지 몰라 디딜방아에 계속 몰리고 있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다.

 

길이 약 4m의 참나무로 만들어진 이 디딜방아는 동네 누구나 손쉽게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벼 보리는 물론 고추나 참깨 심지어는 떡과 고물까지 만들 수 있는 만능 기구. 16세 때 이 동네로 시집와 디딜방아를 곧잘 애용해 왔다는 이남희(59)씨는 “기계방아로 빻는 것에 비해 디딜방아로 빻은 고춧가루는 더 맵다”고 디딜방아의 예찬론을 늘어놓았다. 또 동네 황복실(82)옹은 “1백여 년간 동네 사람과 친숙하게 지내온 디딜방아는 여간해서 고장이 나지 않아 자주 변덕을 부리는 기계나 인간에 비해 정이 더 붙는다”라고 말했다.

 

이 디딜방아는 지난 1881년 가을, 전 부락민이 힘을 합쳐 아름드리 참나무를 1개월간 말리고 깎은 후 다듬어 만들었다는 것. 발을 딛는 곳이나 방앗대 그리고 방아고가 모두 참나무이고 곡식을 넣는 구멍은 호박돌. 그래서 1백 년을 견뎌오면서도 별 탈이 없다.(하략)

【경향신문 1980.02.02】

 

자전거 인프라 확충의 기회를 놓친 아쉬움


기사 속에서는 디딜방아를 미화하고 있지만 일제시대 이전으로 돌아가 곡식을 빻는데 들이는 노동력과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대기하는 것은 꼬박 하루가 날아가는 매우 수고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오일쇼크로 농촌에는 디딜방아가 등장한 것과 동시에 도시에서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자전거 판매가 급증했다. 이에 정부도 자전거 보급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기도 하였다. 유럽의 네덜란드가 오일쇼크의 파고를 자전거를 비롯한 대중교통 타기 정책으로 넘은 사례도 있었기 때문이다.

 

– 관련 글: 네덜란드의 ‘자동차 없는 도로’


만약 이때 한국도 부유한 나라였다면 잠깐 동안의 자전거 붐에 그치지 않고 자전거 확충에 따른 도로설계와 지원사업이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일본이나 네덜란드처럼 자전거 선진국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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