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영화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사람은 얼마나 권위에 약한 존재인가
▲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2012)
우연히 ‘컴플라이언스(Compliance)’라는 소름 돋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특히 각색도 거의 없이 실화가 그대로 재연되었다는 것은 충격적일 정도.
이 영화의 네티즌 평점란을 보면 ‘초등학생도 아니고 저런데 속냐?’, ‘주인공들이 머리가 나쁘다’, ‘답답하다’라는 평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아마 나도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권위에 의한 복종실험‘ 내용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바보 같은 상황 속에 빠진 주인공들에 대한 답답함으로 화를 내며 영화를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1960년, 미국 예일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1984)은 전문 연기자들 2명을 섭외한다. 그들이 맡은 역할은 한 명은 저명한 교수였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제자 역할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실험에 참여해 달라는 말로 거리에서 다수의 사람을 도우미로 섭외했다.
실험의 내용은 ‘체벌이 학습효과에 미치는 영향‘이었는데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도우미들은 학생에게 전기충격을 가했으며 한 문제씩 더 틀릴수록 15V씩 전압을 높이도록 지시했다.
▲ 스탠리 밀그램과 그의 가짜 전기 충격기
학생 역할의 전문연기자는 감전된 연기를 실감 나게 펼쳤고, 도우미들은 처음에는 몇 번의 실험을 하고는 도저히 못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수가 “그 정도로는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 “결과는 내가 책임진다”라고 말하자 6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450V까지 단계를 올려 버튼을 눌러댔다. (450V는 사람이 즉사할 수도 있는 전압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맹목적인 권위에 대한 복종을 보여준 유명한 실험으로 피실험자들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데 옳지 못한 명령에도 버튼을 왜 눌렀냐?‘는 질문에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 실험은 KBS 예능프로그램 스펀지에서도 그대로 재현하였는데, 한국판 실험에서도 단 1명만이 ‘도저히 못 하겠다’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뿐, 나머지 실험 대상들은 무표정하게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또 EBS에서 했던 비슷한 실험다큐에서는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경찰 제복을 입은 연기자가 쓰레기를 줍게 하고 따르지 않으면 체벌을 실시하자 황당해하면서도 묻지도 않고 지시를 이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직업, 학력, 경제적 상황 등 나보다 나은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그건 옳지 않다‘라는 말을 용기 내어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며, 그가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고 후회하더라도 다시 똑같은 상황이 주어지면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이처럼 권력자들에게 인간은 맹목적으로 순종하고 따르며 그 사람의 답이 맞느냐 틀리냐는 따져 묻지 않는다. 단지 ‘권위자가 낸 답이니 나보다는 나을 것이다‘라는 비이성적인 신봉만이 있을 뿐.
그러니 직업 사칭과 학력 위조가 흔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빛나는 학력과 명함만 들이대면 나보다 잘난 사람들도 순식간에 내 앞에서 보이지 않는 규제인 ‘권위’라는 사슬에 묶인 순한 양이 되어버리는 게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컴플라이언스’의 실화 사건은 아주 극단적인 피해로 나타난 경우지만 그 속의 과정은 실험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실제 사건
2004년 4월 9일, 미국 켄터키주 마운트워싱턴(Mount Washington)의 맥도날드에 경찰(물론 가짜)의 전화가 걸려 온다. 본인을 ‘스캇(Scott) 경관‘이라고 밝힌 가짜 경찰은 부점장인 도나 서머스에게 직원 중의 한 명이 고객의 돈을 훔쳤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이 과정에서 가짜 경찰은 정확히 직원의 이름을 댄 것도 아니었고, “카운터의 젊은 백인 여성…” 이라는 말로 얼버무렸지만, 도나는 “루이스 오그본(피해자)이요?”라고 반문해서 가짜 경찰을 편하게 해주었다. 심지어 도나는 그의 소속과 위치, 자세한 개인 신원도 물어보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이어 가짜 경찰은 인터넷 검색만으로 쉽게 알아낼 수 있는 맥도날드 점장의 이름을 대며 도나를 안심시켰고, ‘협조’해 달라는 용어로 자신의 권위를 부각했다.
▲ 사건이 발생한 마운트워싱턴의 맥도날드 지점(2005년)
결국 도나는 그의 고압적인 자세와 명령조의 말에 루이스 오그본을 밀실같은 사무실로 데려와 알몸 수색을 시작하였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에는 가짜 경찰의 권위도 있었지만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실험’ 에서와 같이 “모든 것은 제가 책임집니다.“라는 말이 지시를 받은 자가 책임 회피를 할 수 있는 출구가 되었다. 루이스 오그본이 몇 번이고 나가게 해달라거나 경찰에 전화하면 안 되느냐고 해도 도나는 ‘경찰을 기다려야 한다’라며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고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다.
이후 정신없이 바쁜 패스트푸드점의 피크타임이 겹치면서 도나는 관련도 없는 없는 자신의 약혼자 월터 닉스를 매장으로 불러내 피해자 루이스 오그본을 감시하도록 한다. 물론 ‘직원이 아닌 사람을 사무실에 들이면 안 된다’는 메뉴얼이 있었지만, 더 큰 권위를 가진 경찰의 허락이 있었으니 문제될 것이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 영화 속 피해자 베키(배우: 드리마 월커)
어이없게도 도나의 약혼자 월터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찰이라는 권위에 맹목적으로 따랐다. 어린 여성의 신체 구석구석을 살피고 체벌을 가하라는 명령에 따르는가 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지시’까지 결국 이행하게 된다.
경찰을 사칭한 장난전화는 토마스 심스(Thomas Simms)라는 유지보수 담당직원이 ‘오그본의 앞치마를 벗겨라’는 지시에 당연한 의심을 하면서 막을 내렸다. 지옥 같은 하루를 중단시킨 심스는 9학년을 중퇴한 학력(한국으로 치면 고1 중퇴)을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하게도 사건 현장에서 가장 권위가 없는 인물이었다.
출동한 (진짜)경찰이 최대 피해자인 루이스 오그본에게 어째서 지시에 맹목적으로 따랐냐고 묻자 “그냥 시키는 대로 했어요“라는 허무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 실제 CCTV 장면
한편, 권력자가 부여한 ‘권위’를 받아 든 대리인들은 처음에는 모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경찰이 이렇게 하래’라며 마치 ‘나는 선하고 이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위에서 시키니까 내 책임이 아니야’라는 모습을 보이며 지시를 ‘전달’만 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듯하던 대리인들도 루이스 오그본이 과한 지시를 따르지 않고 머뭇거리자, 나중에는 화를 내며 권위를 능동적으로 행사한다. 그들도 강자가 명령을 내리면 약자는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권위’라는 절대반지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빠진 것이었다.
▲ 감독과 주연배우들
사건 이후
‘맥도날드 장난전화’ 사건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피해자들은 어떤 상황에 처했고 범인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1. 부점장의 약혼자 월터 닉스
도나의 약혼자 월터 닉스(Walter Nix Jr., 43세)는 불법감금과 미성년자 학대로 징역 5년 형이 선고되었다. 그나마 원래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 학대는 최소 20년 징역형이지만, 전화를 걸어 지시한 상대가 진짜 경찰인 줄로 착각했다는 호소가 참작되었다.
사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가짜 경찰이 월터를 통해 지시한 루이스 오그본에 대한 알몸수색이나 팔벌려뛰기, 이어지는 체벌과 보상 등의 과정은 눈치가 극도도 없더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가 책임을 회피하고 옳지 않은 일임을 완전히 인지할 수 있었음에도 행한 것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을 수준이라는 배심원들의 판단이 따랐다. ‘잔돈을 훔쳤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을 알몸 수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2. 장난전화 혐의자 데이비드 스튜어트
장난전화 가해자인 데이비드 스튜어트(David R. Stewart, 38세)는 5명의 자녀가 있는 사설보안업체(Corrections Corp. of America)의 직원이었다. 사설보안업체에 채용되기 전에는 쇼핑몰 경비원, 보안관 대리로 자원봉사를 했다. 모두 권위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제복을 입는 직업을 가져온 인물이었다.
최초 경찰의 조사 전화를 거부한 그는 경찰이 직접 회사로 찾아오자 미친 듯이 땀을 흘리며 벌벌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에 “혹시 다친 사람이 있나요?”라고 반문하며 “이제 끝났군. 아멘”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체포된 이후에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지만, 경찰의 조사로 9개의 패스트푸드점에 장난전화를 건 혐의가 추가되었다.
경찰이 스튜어트의 집을 수색한 결과 경찰 서류, 경찰 잡지, 유니폼, 권총 등이 발견되는 등 ‘경찰이 되고 싶어한‘ 그의 욕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튜어트가 장난전화 속에서 피해자들에게 당당한 경관의 모습으로 사기를 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역할극에 깊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거는 순간만큼은 스튜어트는 진짜 경찰관이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스튜어트의 변호사는 “그와 수많은 대화를 해보았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설득력은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라고 변호했다.
9번의 장난전화 역시 통화가 발신된 공중전화에서 스튜어트를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스튜어트의 전화 음성을 여러 개의 목소리 중 정확히 식별해 낸 피해자들이 없었다. 그는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 무죄판결을 받고 변호사에게 감사를 표하는 스튜어트
이후 루이스 오그본의 민사소송에 대해서는 뻔뻔하게도 피해자에게 편지를 보내서 “당신의 고소장을 잘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책임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피해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집과 차와 직장을 모두 잃었기 때문입니다.”라며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스튜어트가 체포된 이후에는 비슷한 장난전화가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가 체포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체포를 본 동종범들이 겁을 먹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3. 부점장 도나 서머스
부점장 도나 서머스(Donna Summers, 51세)는 불법감금과 경범죄 등의 혐의로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사건 이후 약혼자인 월터와 관계를 끝냈으며, 직원이 아닌 사람을 사무실로 오게 한 점과 허용되지 않은 알몸수색을 한 이유로 맥도날드에서도 해고되었다.
이후 도나 서머스는 ‘맥도날드가 장난전화에 대해 경고를 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5천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하였다. 1995년에 처음 보고된 패스트푸드점에 대한 장난전화는 2000년 말까지 실제 피해로 이어진 경우가 12건 이상이었으며, 2003년 말에는 60건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판 끝에 법원은 맥도날드에게 110만 달러의 금액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맥도날드 측은 항소하였고 결국 50만 달러를 도나에게 지급했다. (40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과 10만 달러의 보상적 손해배상)
4. 피해직원 루이스 오그본
사건 발생 3년 후,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 루이스 오그본(Louise Ogborn, 18세)은 맥도날드를 상대로 무려 2억 달러의 피해보상소송을 제기하였다.
도나 서머스의 소송 이유와 마찬가지로 이미 미국 패스트푸드점을 대상으로 이런 장난전화 사건이 유행처럼 일어나고 있었고, 이에 맥도날드가 위험성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보안시스템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또 대학 진학을 포기한 오그본이 외상 후 만성 스트레스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우울증 치료제를 남용하고 있다는 정신과의사의 증언이 민사소송에서 이루어졌다.
▲ 재판 받는 루이스 오그본
결국 법원은 맥도날드에게 610만 달러(500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과 110만 달러의 보상적 손해배상)를 피해보상 금액으로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맥도날드는 즉각 항소했는데, 재판이 길어지면서 신변노출이 계속되자 오그본이 맥도날드 측과 징벌적 손해배상을 포기하는데 합의하면서 결국 소송을 종결짓고 110만 달러가 지급되었다.
사건 발생 후 맥도날드는 공식사과성명을 냈으며, 장난전화를 방지하고 직원들의 인권 보호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고자 관리자 훈련프로그램을 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