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2월 28일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대왕의 치적과 평가

1. 왕권강화


베히스툰 비문에 당당히 기록되어 있듯이 다리우스는 말 그대로 말과 마부의 공으로 왕위에 올랐다. (관련 글: 다리우스 대왕의 집권과정)

 

이는 왕권과 국가의 지배권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였지만, 당시에는 이를 불법적인 쿠데타로 규정하고 반란을 일으킨 폭도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왕위에 오른 다리우스는 우선 가우마타의 잔당들과 정통성을 의심하여 다리우스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부 귀족가문 세력을 진압해야만 했다.

 

다리우스의 판단대로 개방적인 지형의 페르시아는 외부로 진출하기에 유리한 위치였지만, 반대로 외부의 침략에도 쉽게 노출될 수 있었기에 국방력의 강화와 내란의 진압은 시급한 선결과제이기도 하였다. 1
▲ 베히스툰 비문에 새겨진 ‘반란자’ 가우마타를 짓밟는 모습

 

다리우스의 판단대로 개방적인 지형의 페르시아는 외부로 진출하기에 유리한 위치였지만, 반대로 외부의 침략에도 쉽게 노출될 수 있었기에 국방력의 강화와 내란의 진압은 시급한 선결과제이기도 하였다.

 

2. 정복사업


■ 바빌로니아 정벌

내란이 진압될 즈음 바빌로니아에서 느브갓네살 3세에 의한 반란이 발생한다. 다리우스와 오타네스의 군대가 타 지역의 반란군 토벌에 나선 틈을 타 바빌로니아의 부흥을 주장하며 봉기한 것이다.

 

속주의 봉기가 성공할 경우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일대에 지배권을 행사하던 페르시아의 권위가 실추될 것은 명확관야. 즉시 다리우스는 대군을 이끌고 바빌로니아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바빌로니아는 여타 반란군과 달리 강하게 저항하였고, 양군의 대치는 점점 장기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노새가 말을 낳는 날이 우리 바빌로니아가 함락될 날이다.’라는 말이 퍼질 정도로 바빌로니아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그러나, 실제로 노새가 말을 낳는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한 후 민심이 동요하자 분위기를 잡은 다리우스는 이간책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바빌로니아를 함락시켰다.

 

■ 스키타이 정벌

스키타이족은 BC. 6세기부터 BC. 2세기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유목민족이다. 이전 유라시아 대륙의 지배적인 유목민족인 킴메르족을 몰아내고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아리안계 백인으로 유목과 농경 세력의 연맹체였고 돈강에서 카스피해, 크림반도까지 진출하였으며 동유럽과 남부 러시아, 이란 동부를 주무대로 활동하였다.

 

스키타이족은 크게 동스키타이와 서스키타이로 나뉘는데 모두 페르시아 계통의 민족적, 언어적 뿌리를 갖고 황금 문물, 유목생활, 고깔모자 등으로 상징되는 공통점을 공유하였다. 그러나 이란 동부의 동스키타이족, 흔히 사카족으로 불리는 족속은 일찌감치 다리우스 대왕에게 복종하여 속주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에 충실하였으나, 동유럽과 우크라이나에 포진한 서스키타이족은 페르시아의 권위에 반발하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다리우스 대왕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 정벌에 나선다.

 

다리우스의 판단대로 개방적인 지형의 페르시아는 외부로 진출하기에 유리한 위치였지만, 반대로 외부의 침략에도 쉽게 노출될 수 있었기에 국방력의 강화와 내란의 진압은 시급한 선결과제이기도 하였다. 3
▲ 베히스툰 비문의 부조. 맨 우측이 동스키타이족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이한 스키타이족은 퇴각에 퇴각을 거듭하며, 목초지와 거주지를 불태우는 이른바 ‘청야(淸野) 작전’으로 이에 대항하였다. 진군을 거듭하던 페르시아 군은 보급선의 단절과 러시아의 추위에 노출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페르시아 군은 진퇴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다. 전황 판단에 현명했던 다리우스 대왕은 철수를 지시하였다.

 

이는 혹한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정벌군과 방어군의 전술 지침의 최초 사례가 되었고, 2천 년의 시간이 더 흐른 후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러시아군을 맞아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후배 정복자들과는 달리 다리우스 대왕은 러시아 평원에서 벌어진 청야 작전에 휩쓸리지 않고 과감한 손절매로 더 이상의 전투력 손실 없이 부대를 복귀시켰다는 점이다.

 

■ 그리스 정벌

동부와 북부의 스키타이 정벌을 마친 다리우스는 곧바로 서부로 눈을 돌린다. 도시국가들과 활발한 해상무역으로 제국의 경제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서부 정벌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BC 510년에 이르러 그리스와 연안 국가, 발칸반도의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에게해 도시국가들을 복종시킨 다리우스는 참주를 파견하여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평등하고 관대한 인재 등용으로 서부지역을 빠르게 안정시켰다.

 

그러나 경제적 이해관계에 눈이 먼 반란세력들이 이오니아와 아테네를 중심으로 암약하였고 이내 페르시아계 귀족들을 추방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에 다리우스 대왕은 다티스(Datis) 장군과 아르파테네스(Artaphernes)를 시켜 그리스를 공격했으나 이오니아 지역의 반란만을 진압하고 그리스 본토 진압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다리우스 대왕은 친히 군대를 지휘하여 직접 그리스 공략에 나서려 했으나 이번에는 남부전선 이집트에서 소요가 발생하여 이에 대한 준비를 하던 중 병으로 사망하여 다리우스 대왕의 정복사업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3. 통치방식


다리우스 대왕은 키루스 대왕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속주에 대한 일정 정도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느슨한 관리정책을 유지하면서 지도자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였다.

 

다리우스 대왕은 법령을 정비한 후 제국을 샤트라피라 명명한 20개 지역으로 나누고, 각지에 샤트랍이라는 총독을 임명하여 통치하였다. 페르시아인의 근원이자 다리우스 대왕의 고향인 파르사를 제외한 모든 지역은 샤트랍의 관리 하에 복종과 공물 조공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샤트랍은 관할지역 기초단위 행정구역까지 관리를 파견하여 수직적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였으며, 모든 샤트랍은 다리우스 대왕의 감사를 받았으며 주요 요충지에는 방위사령부를 설치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하였다. 이를 위해 왕의 눈, 왕의 길이 설치되었으며 빠른 연락과 행정조치를 위해 역참 제도가 운용되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 전역에 통용된 아람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였으며 페르시아인을 위한 언어를 창제하기 위해 집현전과 같은 기관을 만들어 아리얀이라는 언어를 창제하기도 하였다.

 

4. 교통건설사업


다리우스 대왕은 세계 최대의 제국 페르시아에 걸맞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하였으며 수사, 바빌론과 더불어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다. 페르세폴리스는 폐허가 된 지금도 당시의 영광과 기풍을 느낄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다리우스의 판단대로 개방적인 지형의 페르시아는 외부로 진출하기에 유리한 위치였지만, 반대로 외부의 침략에도 쉽게 노출될 수 있었기에 국방력의 강화와 내란의 진압은 시급한 선결과제이기도 하였다. 5
▲ 세계 최고(最古)의 계획도시 페르세폴리스


또한 국가의 경제력 향상을 위한 해상무역을 지원하였으며 안전한 무역을 위해 상인을 보호할 강력한 해군의 육성에 주력하였다. 제국 각 지역의 균형적 발전과 교역의 증진을 위해 홍해-나일강, 홍해-지중해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였으며, 대규모 건설사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 각지의 기술자와 장인들을 고루 활용하여 문화교류와 경제교류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도록 추진하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하여 제국을 잇는 도로망의 확충은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라는 명칭에 부족함이 없으며 쾌적하고 안전한 주민들의 이동으로 상업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도로건설과 역참제의 병행으로 제국의 관리와 안정은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다리우스 대왕의 건설사업은 단지 힘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사업이 아닌 국가경쟁력과 국민생활의 풍요를 위해 진행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5. 경제발전


다리우스 대왕 치하의 페르시아 제국은 통화의 안정, 해상무역증진과 지역 간 균형발전, 운하와 도로의 개발과 정비를 통한 사회 인프라 건설과 같은 국가경제발전을 위한 물질적인 토대. 그리고, 제국의 법령과 통치질서를 따르는 모든 제국의 신민과 속주민들이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치한 페르시아의 관대한 국가체제. 이 모두가 제국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다리우스의 판단대로 개방적인 지형의 페르시아는 외부로 진출하기에 유리한 위치였지만, 반대로 외부의 침략에도 쉽게 노출될 수 있었기에 국방력의 강화와 내란의 진압은 시급한 선결과제이기도 하였다. 7
▲ 23개국 조공행렬이 조각된 조공행렬도의 일부


페르시아의 모든 건설은 국가 주도의 사업이라 할지라도 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강제로 부과한 것이 아닌 임금노동자의 개념으로 추진되어 경기부양과 소비 증진, 주민들의 인적, 물적, 문화적 교류와 자아실현까지 가능케 한 선진적인 체제를 확립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6. 종교 발전

 

페르시아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로 다리우스 대왕은 조로아스터교의 신실한 신자였다.

 

자신이 아후라 마즈다신에게 제국건설의 명을 받아 신의 의지를 지상에 관철시키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다리우스 대왕의 신과의 교감은 말의 울음으로 왕위에 오르던 일화와 바빌론에서의 노새 일화 등으로 온 세상에 인정받고 있었다.

 

베히스툰 비문에 적힌 글귀인 ‘짐에게 복종하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리로다. 하지만, 거역한다면 죽음만이 있을 것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다리우스 대왕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와 관대한 국가통치체제를 병행하였는데 이는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제국의 법도와 통치질서에 복종하는 속주민들은 민족과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신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다리우스 대왕은 세계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한 후에도 키루스 대왕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페르시아의 관대한 정신을 망각하지 않았으며 이를 더욱 계승 발전시켰던 것이다. 여타 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이민족과 이교도에 대한 자비와 관용이 페르시아에서 이루어졌고 유대교와 이집트의 사원 및 기타 종교들이 다리우스 대왕의 지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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