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2월 27일

타이타닉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빙산과 충돌했다” : 1912년 4월14일 밤

“즉각적인 구조를 요청한다” 

“빙산과 충돌했고, 침몰하고 있다” 

“여자들을 구명정으로 탈출시키고 있다” 

“구조를 재요청한다. 이곳의 날씨는 맑고 청명하다” 

“신호가 희미하다”


가족과의 재회, 연인 간의 로맨스, 아메리칸 드림등 이루지 못한 사연들을 간직한 타이타닉호가 침몰한지도 100년이 넘었다. 1
▲ 아일랜드 해안에서 찍힌 타이타닉의 마지막 모습

 

가족과의 재회, 연인 간의 로맨스, 아메리칸 드림등 이루지 못한 사연들을 간직한 타이타닉호가 침몰한지도 100년이 넘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고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타이타닉 참사와 관련해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타이타닉은 침몰했다?


선박 침몰사고의 대부분은 허리케인이나 강풍으로 인한 대형 파도가 원인이다.

 

하지만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빙산에 충돌한 후 15일 결국 물밑으로 사라졌던 타이타닉의 침몰은 오히려 파도가 잠잠했기 때문으로 추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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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의 날씨와 바다 상태는 맑았지만, 타이타닉이 항해하기에는 지나치게(?) 완벽했다. 당시 바다 상태는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기 때문에 파도가 일어나지 않아 거의 수평에 가까운 바다였다고 한다. 또, 달이 가려져서 육안으로 빙산을 발견하기 어려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야간항해 중 달이 없을 때는 파도가 빙산을 발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바다에서는 밤이 되면 플랑크톤의 일종인 와편모조류(渦鞭毛藻類)들이 해수면으로 올라오는데, 이런 플랑크톤을 포함한 파도가 빙산에 부딪치면서 나오는 인광(燐光)들이 극도로 어두운 밤바다에서 큰 장애물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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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편모조류(渦鞭毛藻類)


하지만 타이타닉이 침몰한 밤의 기상상황은 4월의 북대서양치고는 아주 희귀한 조건들이 모두 갖추어진 운명 같은 날이었다.

 

– 달이 가려졌고,
– 바람까지 불지 않았고,
– 파도와 너울조차 발생하지 않았으며,
– 그로 인해, 빙산에 부딪치는 물결이 발하는 빛도 없었다.

 

이날을 제외하면 대부분 육안으로도 멀리서 빙산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사고 지점이라고 한다. 실제로 ‘빙산이 가깝다’ 라는 경고가 6번이나 알려졌음에도 승무원들이 무시한 것은 당장 눈앞에 빙산이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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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타닉이 충돌한 빙산

 

만약 이날 기상상태가 나빴더라면 사고 후 구조활동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애초에 구조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타이타닉의 선원들은 육안으로 바다를 감시했다


찰스 라이톨러(Charles Lightoller)는 젊은 나이에 이미 베테랑으로 인정받는 선원이었다. 13세부터 배를 타기 시작한 그는 타이타닉의 2등 항해사였으며 침몰뒤 살아남은 승무원 중 가장 상급장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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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라이톨러(오른쪽)

 

그는 배와 운명을 함께한 스미스 선장과 헨리 와일드 항해사장(부선장)을 대신해 여성과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구명정에 태우는 작업을 이끌었다. 특히 배가 침몰하면서 발생한 거대한 기차 2대가 들어갈만한 소용돌이를 아슬아슬하게 몇 센티미터 차이로 피하면서 마지막으로 탈출해 ‘용기있는 승무원’으로 칭송을 받기도 했다.

 

라이톨러는 타이타닉호의 탑승이 최초의 간부 임용으로, 사실 그가 2등 항해사를 맡게 된 것은 갑작스러운 결정에 의해서였다. 원래 2등 항해사였던 데이비드 블레어(David Blair)가 하선을 하게 되면서 스미스 선장은 2등 항해사였던 헨리 와일드(Henry Wilde)에게 최고 책임자의 위치를 주었고 3등 항해사였던 라이톨러가 2등 항해사가 된 것.

 

갑작스러운 간부진의 변화는 타이타닉의 침몰에 영향을 미쳤을까?

 

결과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전임인 데이비드 블레어가 쌍안경이 들어있는 망대(crow’s nest)의 락커열쇠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은 채로 내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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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빗 블레어가 가지고 내린 열쇠, 경매에서 9만파운드(한화 약 1억 5천만 원)에 낙찰

 

결국 승무원들은 누구도 쌍안경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라이톨러는 목적지인 뉴욕항에 정박하면 쌍안경을 새로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안전규정을 무시하고 영국 사우샘프턴을 떠난 배는 뉴욕에 닿지도 못한 채 수장되었다.

 

만약 데이빗 블레어가 쌍안경이 든 락커의 열쇠를 두고 내렸거나, 찰스 라이톨러가 출발하기 전, 혹은 경유지였던 프랑스 쉘부르(Cherbourg)나 아일랜드의 퀸스타운(Queenstown)에서라도 쌍안경을 보급했다면 타이타닉과 수백 명의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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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늦게 꺼내진 타이타닉의 쌍안경

 

명예보다 사람들의 죽음이 가슴 아팠던 일본인 승객


타이타닉이 침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영웅과 비겁자가 태어났다.


마지막까지 연주를 계속한 영웅적인 악단 연주자들과 여성들에게 보트를 양보한 신사들은 칭송을 받았으며, 근거리에서 구조 신호를 받았지만 동반침몰의 위험성이 있다며 외면한 캘리포니아 호의 선장과, 타이타닉을 소유한 선박회사의 회장이면서도 구명보트에 올라탄 브루스 이즈메이(J. Bruce Ismay)와 같이 비난의 포화를 맞은 사람들도 있었다.

 

호소노 마사부미(細野正文)는 타이타닉에 탑승했던 유일한 일본인이었다. 그는 메이지(明治)시대의 철도관료로, 러시아에서 2년간의 유학을 끝내고 지인이 있는 영국을 방문 후 뉴욕으로 가기 위해 타이타닉에 탑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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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소노 마사부미(細野正文, 1870~1939)

 

타이타닉이 빙산과 충돌한 그때, 승무원의 외침에 깨어나 구명조끼를 받아든 그는 구명정 근처까지 갔다가 보트가 부족한 것을 보고 좌절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 좋게 눈앞의 구명정에 두 명이 더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생겼고 기적처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구조 후 미국에 도착했을 때, 호소노 마사부미는 ‘행운의 일본인‘으로 명명되었다.

 

그때만 해도 유일한 일본인이라는 것이 불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얼마 후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에 실린 이야기로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잡지에는 영국의 교수 로렌스 비슬리(Lawrence Beasley)의 “사람들을 밀쳐내고 보트에 탄 비열한 일본인이 있었다“라는 증언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창피한 일본인‘이라는 비난과 함께 그는 직장을 잃었고, 언론에 의해 오랫동안 겁쟁이로 비난받게 된다. ‘일본의 남자라면 명예롭게 죽어서 돌아와야했다‘라는 것이었다.

 

호소노 마사부미는 평생 비난 속에 살면서도 변명 한마디 없이 자식들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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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소노 마사부미의 묘

 

그런데 1997년,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타이타닉‘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구조 직후 쓰인 호소노 마사부미의 수기가 유족에 의해 공개되면서 이야기는 반전을 맞게 된다. 타이타닉의 유품 회수 작업을 하던 RMS 재단은 호소노 마사부미의 수기와 인양된 다른 승객 간의 기록을 대조해 본 결과, 로렌스 비슬리(Lawrence Beasley) 교수의 구명정에 탑승했던 사람은 중국인으로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호소노 마사부미가 탑승했던 것으로 추정된 10호 구명정 승무원의 기록에는 ‘아르메니아인 남성 2명이 추가로 탑승했다’는 증언만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승객이 탑승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런데 10호 구명정을 타고 생존한 아르메니아인이 훗날 회고록에서 ‘일본인과 함께 노를 저었다‘ 라는 증언까지 남기면서 그의 존재는 확실해졌다.

 

결국 그 증언 덕분에 호소노 마사부미는 10호 구명정에 타고 있던 것으로 판명되었고, “사람들을 밀어냈다”고 그를 비난했던 로렌스 교수는 13호 구명정에 탑승한 것이 드러났다. 유족들은 ‘드디어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했지만 오랜 시간 정설로 다루어졌던 오해는 지금도 여전히 해난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비겁했던 사례로 꺼내어 다루어지고 있다.


어째서 그는 본인이 아니면서도 평생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을까? 호소노 마사부미가 생존의 갈림길에서 남긴 수기의 일부로 그 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2등실 승객이었던 나는 승무원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밖으로 나와보니 배가 침몰 중이었다.

 

외국인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라는 지시가 들려왔다.

긴급 구조 조명탄의 파랗고 눈부신 광경에 비명을 지르고 싶은 공포와 절망이 밀려들었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비굴하지 않게 의연한 죽음을 맞이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희미한 희망을 빛을 놓을 수가 없었다.

 

타이타닉호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각오하면서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깊은 슬픔에 빠져있었다.

그때 구명정의 승무원에게서 “2명 더 탈수 있소! 서두르시오!” 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어떤 남자가 보트로 뛰어내리는 것을 본 순간,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는 나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으므로 본능적으로 구명정으로 뛰어들었다. 경비 선원의 권총에 맞아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은 후 물에 빠진 사람들의 끔찍한 신음과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우리가 탄 구명정에도 아이들과 남편과 가족들과 부모님을 걱정하는 아이들과 여자들의 통곡으로 가득했다.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비참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호소노 마사부미의 손자인 일본의 음악인 호소노 하루오미(細野晴臣)는 콘서트를 할 때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며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전력을 쏟고 있다. 2012년에는 타이타닉 희생자의 공동묘지가 있는 캐나다의 핼리팩스(Halifax)를 방문하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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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소노 하루오미(細野晴臣)


할아버지 호소노 마사부미가 생환 후 41세에 낳은 아들이 바로 하루오미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살아오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그이기에 이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호소노 마사부미 외에도 타이타닉에서 생환한 남자들은 자국으로 돌아간 뒤 ‘비겁자‘라는 비난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당시 살아남은 남자들 모두가 스스로 비겁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남은 여생을 살아갔던 것이다. 호소노 마사부미 역시 같은 이유로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직접 겪어보지 않는 한, 그날 밤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마음에 침묵했을 수도 있다.

 

생전의 호소노 마사부미가 가족들에게 가끔 웃으며 했다는 말을 보면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그 마음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살아와서 지금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좋구나”

 

타이타닉은 20년 후면 완전히 사라진다?


타이타닉의 잔해는 아픈 사연들과 함께 북대서양의 해저에 평온히 잠들어 있다. 그런데 새롭게 발견된 금속의 녹을 섭취하는 박테리아 종이 5만 톤의 철을 천천히 먹어치우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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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미생물의 침입이 타이타닉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타이타닉은 지난 100년간 깊은 바다에 잠들어 있었지만, 이제 15년에서 20년 후면 북대서양의 바닥에는 얼룩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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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로모나스 타이타닉(Halomonas titanicae): 철과 녹 표면에 붙어 침몰된 선체의 금속을 먹으며 살아간다.


타이타닉의 흔적은 인류 문명의 맹신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좋은 교재였다. ‘불침선‘이라는 인간의 자만심과 함께 출항했던 배가 아이러니하게도 100년 동안이나 바다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셈. 타이타닉이 완전히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은 하나의 교훈이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술꾼이라서 살아남은 사람


찰스 존 조그힌(Charles John Joughin)은 타이타닉의 제빵사였다. 배가 빙산에 충돌했을 때 취침 중이던 조그힌은 급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구명정을 내리는 작업에 동참하였고 승객들에게 빵을 나눠주며 패닉에 빠진 사람들을 진정시켰다고 한다. 또한 수십 개의 의자를 바다로 집어던져 사람들이 잡고 떠 있을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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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존 조그힌(Charles John Joughin)


찰스는 이런 헌신적인 행동을 한 덕분에 구명정에 탑승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를 바란다‘며 그 기회를 사양하였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술이나 먹자‘라는 결심을 하고는 진열장에서 술을 꺼내 퍼 마시기 시작했다.

 

마지막 구명정이 떠나고 결국 타이타닉은 침몰했다. 찰스는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차가운 바닷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물 위에 떠있는 생존한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돌아온 구명정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는 술 덕분에 거의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실은 머리가 물에 젖지 않은 덕분에 저체온으로 죽음에 이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그는 술꾼답게 평생 ‘술이 나를 구한 것‘이라고 우겼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


영화 ‘타이타닉(1997)’은 사랑을 위해 헌신한 남자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감동적인 로맨스를 담은 내용이다. 하지만, 타이타닉에는 그보다 더 강렬한 사랑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의 소유주였던 이시도르 스트라우스(Isidor Straus)와 아이다(Ida) 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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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계 미국인이었던 이시도르는 뉴욕에서 그의 동생과 유리와 도자기 그릇을 파는 사업으로 큰돈을 번 사업가였다. 부자가 된 후, 로잘리 아이다 불룬(Rosalie Ida Blun)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였고 이후 평생 떨어져본적이 없었다. 어쩌다 일 때문에 따로 떨어질 때면 매일 편지를 썼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잉꼬부부였다.

 

타이타닉이 빙산에 충돌한 그날에도 부부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왕복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이시도르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있다가 아내를 깨워 1등실 승객용인 8호 구명정으로 데려갔다. 1등실 승객 중에서도 VIP였던 그들에게는 당연히 좌석이 제공될 수 있었지만, 아직 탑승하지 못한 여성과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이시도르는 탑승을 포기했다.

 

남겨진 아내는 탑승자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구명정에서 내려 남편에게 돌아갔다.

 

우린 수십년을 함께 했잖아요. 당신이 어딜 가든 나도 가겠어요” 그녀의 이 말은 8호 구명정의 탑승객들과 갑판 위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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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들과 함께 간 부인의 하녀 엘렌 버드는 신분 때문에 1등실 승객들의 구명정에 탈 수 없었다. 그러자 아이다는 그녀를 구명정에 태우고 자신의 모피코트를 벗어주며 “우리 딸, 밤바다가 추울 테니 이걸 입으렴“이라고 말했다. 놀란 그녀는 모피코트를 벗어서 돌려주려고 했지만 부인이 손을 잡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는 이제 그게 필요 없을 것 같구나”라고 말하자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엘렌 버드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노부부가 몰려든 군중들의 뒤로 물러나서 거대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때까지 침착하게 서로의 손을 잡고 갑판 위의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건 사랑과 헌신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이었어요”라고 증언했다.

 

이 부부의 이야기는 생존자들을 태운 배가 뉴욕에 도착한 뒤, 엘렌 버드를 비롯한 수많은 목격자들이 기자들에게 증언함으로써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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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영화 ‘타이타닉’의 잭과 로즈는 사실 따지고 보면 하룻밤 풋사랑에 불과하지만, 스트라우스 부부의 이야기는 감동을 넘어 존경심마저 든다. 놀라운 점은 부부는 4살의 터울이 있었지만 [이시도르(1845년생), 아이다(1849년생)] 생일은 2월 6일로 같다.

즉, 운명처럼 같은 날짜에 태어나 같은 날짜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시도르 스트라우스의 시신은 맥케이 베넷(Mackay-Bennett)호에 의해 인양되었지만 부인의 시신은 결국 찾지 못했다. 이시도르는 브루클린에 있는 베델 묘지의 ‘Straus – Kohns 가족묘’에 안치되었으며, 언젠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유골함(부인을 위한) 자리 하나는 비워졌다.

 

또한 그들의 사랑을 기리고자 뉴욕 맨해튼에는 공원과 기념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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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시도르가 소유했던 메이시스 백화점에 근무하던 5천 명의 직원들은 부부를 위한 기념패를 만들어 1층 로비의 벽에 걸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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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패는 2005년 메이시스 백화점이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제거되어 유족들에게 주어졌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백화점 측의 행위를 ‘모욕적인 행동‘이라며 분개하는 등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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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함께 잠들어 있는 무덤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있다.

 

이 사랑은 많은 물로도 꺼뜨릴 수 없으며, 홍수라도 침몰시키지 못할지이다“(Many waters cannot quench love, neither can the floods drown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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