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인 세브뤼긴(Antoin Sevruguin)은 아르메니아·조지아계 가문 출신으로 테헤란에서 태어난 이란의 대표적 사진가이다.
그는 아버지의 급사 후 조지아 티플리스를 거쳐 화가 수업을 받다가, 귀국 후 1870년대 초반 사진스튜디오를 열어 활동을 시작하였고, 나시르 앗딘 샤(Naser al-Din Shah Qajar) 왕실의 공식 사진사로 임명되어 왕실 의례와 귀족 인물 사진을 다수 촬영하면서 유럽박람회에서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 안토인 세브뤼긴(Antoin Sevruguin, 1851~1933)
특히 사진기술의 초창기에 이란 전역과 유적지를 광범위하게 여행한 덕분에 희귀한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시각적인 자료로 남아 19세기 이란 사회·문화·건축 연구의 핵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팔미라(Palmyra) 출신 샤푸르 1세(Shapur I)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를 항복시킨 뒤 세운 승전기념비다. 인물석에 새겨진 고대 페르시아어 비문이 뒷면에 남아 있는데,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샤푸르에게 항복한다”는 내용이다. 사진 속 비석은 거대한 암벽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 비샤푸르는 서기 3세기 샤푸르 1세가 도시를 건설한 곳으로, 고고학 발굴로 웅장한 도시유적과 함께 많은 사산 조각상이 출토됐다. / 1900년경

▲ 샤푸르 2세(서기 4세기) 때 그를 보좌했던 바흐람 2세(Bahram II)가 외국 사절단을 맞이하는 모습을 담은 부조. 화려한 의복을 걸친 바흐람 2세가 사절들에게 손짓하며 연회를 베푸는 모습으로, 비샤푸르 유적에서 발견됐다. 고대 페르시아어로 인물과 연회를 묘사한 비문이 일부 남아 있다. / 1880년대~1930년

▲ 샤푸르 1세(Shapur I)의 승전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 역시 거대한 바위에 음각된 부조인데, 샤푸르 1세는 칼을 들고 로마 황제를 눌러앉히고 있다. 이 부조는 서기 260년(샤푸르 1세 통치 중)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880년대~1930년

▲ 하마단 근교에 있는 간즈나메(Ganjnameh)의 석벽 비문.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Darius I)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가 새긴 비문으로, 왼쪽에는 다리우스 1세, 오른쪽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어·신바빌로니아어·신엘람어 등 세 언어로 동일 내용(왕의 업적과 후손에 대한 찬양)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간즈나메 비문은 바위 면에 음각되어 있으며 기원전 5세기경에 제작됐다. / 1880년대~1930년

▲ 이란 후제스탄주 디즈풀(Dizful)에 있는 사산 시대에 건설된 다리(Band-e Kaisar)와 물레방아(수차) 유적. 이 다리는 로마 포로들이 샤푸르 1세(Shapur I)를 위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당시 고도의 관개시설과 함께 운하로 사용됐다. 사진에서 보이는 다리는 반원형 아치 형태의 돌다리 흔적이며, 옆에는 물을 끌어올리는 수차의 잔해도 있다. / 1885년

▲ 테헤란 인근 고대도시 레이(Rayy)에서 촬영된 조로아스터교 침묵의 탑( Zoroastrian Tower of Silence, Khamushan Tower). 이곳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대지와 불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노출 처리하는 장례 공간이다. 탑의 평면은 원형이며, 중앙의 구덩이에 해골이 모이고, 가장자리에는 시신 노출 공간이 배치된다. / 1899년 이전

▲ 사산 왕조의 왕 나르세(Shah Narseh)가 여신 아나히타(Anahita)로부터 즉위 축복을 받는 장면을 담은 부조. 나르세는 샤푸르 1세의 왕자였으며, 서기 293년부터 통치했다. 여신 아나히타가 손을 들어 나르세에게 신권(神權)을 부여하는 모습이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부조 옆에는 고대 페르시아어가 새겨져 있으나 글자 일부가 훼손된 상태다. / 1902~1905년

▲ 나크셰 로스탐 인근에 있는 나크셰 라자브(Naqsh-e Rajab) 유적에서 촬영된 부조. 조로아스터교 최고 사제인 카르티르(Kartir)를 묘사했다. 이 부조는 서기 3세기경에 제작되었고, 카르티르의 얼굴과 고대 페르시아어로 된 31줄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 1900년경

▲ 조로아스터교의 화로(아테쉬카데, Atashkadeh) 유적. 바위 면에 설치된 제단 모양이며, 옛 사산인들이 불을 피워 올리는 장소였다. 이 유적은 사산 시대(3~4세기)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 1902~1905년

▲ 나크셰 로스탐(Naqsh-e Rostam)의 암굴묘. 이곳은 아케메네스와 사산 두 왕조의 성역이 한데 모여 있는 신성한 공간이다. / 1898~1902년

▲ 다리우스 1세 묘(좌측)와 크세르크세스 1세 묘(후경)가 함께 보이는 모습. 두 거대한 암굴 묘의 위에는 왕의 초상이 음각되어 있으며, 앞에는 넓은 계단식 광장이 펼쳐져 있다. 고대에는 제례 행사를 위해 백성들이 이곳에 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 1898~1902년

▲ 아케메네스 왕조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년)의 묘실 내부 모습. / 1902~1905년

▲ 다리우스 1세 묘실의 다른 각도 사진. 벽면에는 조각 문양과 고대 페르시아어 비문이 있지만 어두운 실내에서 당시의 사진 기술로는 포착이 어려운 시대였다. / 1902~1905년

▲ 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기원전 486~465년)의 묘실 외부의 정면 모습이다. 다리우스 1세 묘와 같은 암벽면에 같은 형식으로 새겨져 있으며, 다리우스 묘보다 약간 오른쪽에 있다. 묘실 전면에는 왕의 얼굴 옆모습과 아케메네스 문장이 조각되어 있고, 내부에는 제단 구조가 있다. / 1898년~1902년

▲ 거대한 바위 벽면에 왕의 즉위 부조 두 개가 보인다. 왼쪽 부조에는 호르미즈드(Hormizd, 즉 아후라 마즈다)가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I, 사산 왕조 창시자)에게 왕권을 부여하는 장면이, 오른쪽에는 바흐람 2세(Bahram II)가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 1898년~1902년

▲ 오른쪽에서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가 말에 올라 서 있는 채로 왕권을 상징하는 고리를 아르다시르 1세(Ardashir I)에게 내밀고 있다. 부채를 들고 서 있는 인물은 조로아스터교 최고 사제인 카르티르(Kartir)로 사산조 승려 계층의 권위를 상징한다. 아후라 마즈다의 말 아래에는 어둠의 신 아리만(Ahriman)이 짓밟혀 있어 선과 악의 대립을 시각화하고 있다. / 1900년경

▲ 조로아스터교 성전 카바예 자르토슈트(Ka’ba-ye Zartosht) . 정사각형의 4면 탑 구조로, 높이는 약 12m이다. 명확한 기능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종교적 제례 장소로 여겨지며, 이란의 상징적인 고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 1902~1905년

▲ 샤푸르 1세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승리로 잡아 항복시키는 부조. 발레리아누스는 260년에 포로가 되었고, 이 장면은 그 승리를 기념해 제작됐다. 사산 제국이 로마를 이겼음을 과시하는 상징적 유물이다. / 1898~1902년

▲ 말 탄 바흐람 2세(Bahram II)의 전투 장면 부조. 바흐람 2세는 서기 3세기 후반 바그다드 왕국을 상대로 강력한 군사 활동을 벌였는데, 이 부조는 그런 전투 장면을 묘사한다. 왕의 기마상이 크게 부각되어 있고, 주변에 왕궁 풍경이 작게 보인다. / 1902~1905년

▲ 아케메네스 제국 창시자인 키루스 2세(Cyrus II, 키루스 대왕)의 묘전 전경. 기원전 6세기 무렵 준공된 이 묘전은 단층 기단 위에 놓인 직육면체 형태로, 아치나 기둥이 없는 단순한 구조다. 흰 석재로 지었으며, 내부는 방 하나로 되어 있다. 이곳에 키루스의 유해가 봉안됐다고 전해진다. / 1880년대~1930년

▲ 키루스 2세 묘의 다른 각도 사진. 위쪽으로 완만한 지붕 면이 보이고, 앞쪽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갈 수 있다. 6세기 페르시아 조각장인들이 정교하게 돌을 다듬어 만든 이 묘는 페르시아 고고학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 1880년대~1930년

▲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의 만국의 문(Gate of All Nations)과 아파다나(Apadana) 궁전이 동시에 보이는 풍경. 고고학자들은 아파다나가 군주가 거주하는 곳이 아닌 의식용 궁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 1898~1902년

▲ 페르세폴리스에 위치한 크세르크세스 하렘(Harem of Xerxes) 메인 홀의 동쪽 출입문에 일어선 그리핀(griffin)을 찌르는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의 모습이 새겨진 부조. / 1900년경

▲ 아파다나 남쪽 계단 중앙부의 입구 부조. 계단 사이에는 페르시아와 메디아의 전사들이 줄지어 새겨져 있고, 중앙 현관에는 아케메네스 문장이 조각돼 있다. 계단 부조는 아케메네스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다리우스 1세(Darius I)가 세운 것이다. / 1902~1905년

▲ 페르세폴리스 아파다나의 북측 제식 계단에 새겨진 ‘사자-황소 싸움’ 부조. 우측 상단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물은 안토인 세브뤼긴(Antoin Sevruguin) 본인으로 추정된다. / 1900년경

▲ 다리우스 1세의 주거궁인 타카라(Tachara) 입구. 옛 정문과 좌우 기둥 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세기 다리우스 1세(Darius I)가 건설을 시작했고,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가 완성했다. ‘페르세폴리스’는 원래 고대 페르시아어로 ‘파르사(Parsa)’라고 불렸다. ‘파르사’는 페르시아를 의미하며, 도시의 이름이자 국가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 1900년경

▲ 다리우스 1세의 주거궁인 타카라(Tachara) 입구 측면. 페르세폴리스 궁전 중 비교적 원형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내부 바닥과 벽면의 채색 흔적도 남아 있다. 1902~1905년

▲ 아파다나 북쪽의 계단에서 본 서쪽 부조면이다. 수많은 인물들과 말이 새겨져 있고, 일부는 깃발 같은 도구를 들고 있다. 각각 페르시아·스키타이·바빌로니아 등 주변 민족으로 해석되며, 여러 나라로부터 조공과 선물을 받은 페르시아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 1902~1905년

▲ 크세르크세스의 대문(만국의 문) 외관. 양쪽으로 머리가 사람이고 날개 달린 황소의 몸을 가진 라마수(Lamassu)가 대문을 지키고 있다. 각 라마수의 몸통에는 전투 장면과 제례 행렬이 섬세하게 조각돼 있다. / 1900년경

▲ 만국의 문(Gate of All Nations)을 다른 쪽에서 촬영한 모습. / 1898~1902년

▲ 만국의 문(Gate of All Nations)에 세워진 라마수(Lamassu) 상의 정면 모습. 라마수는 수메르·아시리아 등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차용된 형상으로,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왕의 힘과 보호를 상징하는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 1898~1902년

▲ 크세르크세스 궁전(Hadish)의 본전 중앙홀 동벽 남쪽 문틀에 조각된 왕의 의복 부조에 새겨진 문구. 상형문자인 페르시아어·엘람어·바빌로니아어로 ‘크세르크세스, 대왕 중의 왕, 다리우스 왕의 아들, 아케메네스 가문 출신’ 이라는 문구가 병기되어 있다. 삼중 언어 사용은 다양한 민족·지역을 아우르는 페르시아 제국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 1900년경

▲ 궁전 단지 북서쪽 모퉁이 전경이다. 오른쪽에 회의실 역할을 한 트리피룬(Tripylon)이 보인다. 세 방향으로 통하는 ‘삼중 문’을 지니고 있어 ‘Tripylon(triple gate)’이라 명명되었다. / 1898~1902년

▲ 페르세폴리스 내 트리플론(Tripylon) 메인홀 남쪽 출입구에 새겨진 부조. 상단의 날개 달린 파라바하르(Faravahar)는 왕권의 신성함을 상징하며, 그 아래 양쪽에는 왕을 수행하는 시종(파라솔·부채 운반자)이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부조는 다리우스 1세(Darius I)와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에 걸쳐 완성된 아파다나(Apadana) 건축의 일부로, 공식 의례 공간의 문틀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 1898~1902년

▲ 페르세폴리스의 중심을 이루는 왕좌전(Throne Hall)은 크세르크세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의해 완성된 대규모 건축물이다. 사진은 이 건물의 북벽 동쪽 출입구에 새겨진 부조로 왕이 왕좌에 앉아 신하들과 신민을 향해 수신을 베푸는 장면과 아래에는 페르시아·메디아 근위병이 배치되어 제국의 군사력을 강조하고 있다. / 1898~1902년

▲ 페르세폴리스 메인홀 왕좌전 북쪽 벽면의 잔해. / 1898~1902년

▲ 사르베스탄(Sarvestan)에 남은 사산 왕조의 궁전 유적. 바흐람 5세(서기 5세기 중반)가 건축을 시작했고, 아치형 입구가 인상적이다. 5세기 당시 팔메트 장식이 세워진 기둥과, 내부에는 모자이크 무늬가 새겨진 벽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정면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 1880년~1896년

▲ 이란 케르만샤(Kermanshah) 외곽의 타크에 보스탄(Taq-e Bostan) 유적. 대굴과 소굴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산조 예술의 마지막 정수로 평가된다. / 1880년대~1930년

▲ 타크에 보스탄(Taq-e Bostan) 대굴 중앙 입구. 중앙의 조각이 잘려서 보이지 않는데, 왕이 신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 중앙 부조의 전체 모습
중앙에 선 호스로 2세(Khosrow II)는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로부터 권력을 상징하는 고리를 오른손으로 건네받고 있으며, 왼편에서는 물의 여신 아나히타(Anahita)가 작은 항아리를 들고 두 번째 고리를 건네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하단에는 호스로 2세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를 든 채 말에 탄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1880년대~1930년

▲ 타크에 보스탄(Taq-e Bostan) 대굴 왼쪽 벽면 부조. 이 돌조각은 빛이 잘 들도록 깊게 패인 돌 깊은 곳에 위치하며, 호스로 2세(Khosrow II)가 배 위에서 멧돼지 사냥을 하는 모습이 표현됐다. / 1880년대~1930년

▲ 타크에 보스탄(Taq-e Bostan) 대굴 오른쪽 벽면 부조. 호스로 2세(Khosrow II)가 갑옷을 입고 사슴 사냥을 하는 장면이 조각돼 있다. / 1880년대~1930년

▲ 위의 부조를 더 넓게 본 모습. 이 부조는 미완성 상태인데, 이는 호스로 2세(Khosrow II)가 통치 말기에 겪은 좌절과 최종적인 몰락(628년 살해)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 1900년경

▲ 측면에서 본 아르다시르 2세(Ardeshir II) 대관식 부조 상부. 석벽 전체를 음각해 만든 대규모 작품이다. / 1880년대~1930년

▲ 아르다시르 2세(Ardeshir II) 대관식 부조 정면. 아르다시르 2세(중앙)는 샤푸르 2세(오른쪽)의 칙령을 받으며 등장하며, 왼쪽에 서 있는 인물은 고대 이란의 신 미트라(Mithra)이다. 바닥에 깔려있는 사람은 로마 황제 율리우스(Julian)로 추정된다. / 1880년대~1930년

▲ 카자르 왕조 나시르 앗딘 샤(Naser al-Din Shah Qajar)가 옛 길을 재개발하며 조성한 ‘신(新)사산 양식’ 부조. 중앙에 왕이 말 위에서 사슴을 사냥하는 장면을 담았는데, 장식 양식은 고대 사산 양식을 본떠 만들었다. / 1880년대~1930년

▲ 타브리즈의 블루모스크(Blue Mosque)의 외부 출입구. (현재 외부 출입구의 복원된 모습) / 1880년대~1930년

▲ 타브리즈의 블루모스크(Blue Mosque) 내부 통로 모습. 15세기에(1465년) 건축된 이 사원은 푸른 타일과 기하학무늬로 유명했다. 사진에서는 아치형 입구와 정교한 모자이크 문양이 보인다. 이 사원은 1780년 지진으로 파괴된 후 1973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었다. / 1880년대~1930년

▲ 타브리즈 블루모스크(Blue Mosque) 내부 통로 측면. / 1880년대~1930년

▲ 타브리즈 블루모스크(Blue Mosque) 내부 성소에 남은 벽면. (현재 복원된 모습) / 1880년대~1930년

▲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유대교 인물 에스더 왕비(Queen Esther)와 그녀의 사촌 모르데가이(Mordechai)의전설적인 무덤이다. 페르시아 후기인 솔로몬 시대(1세기)에 이들이 이란에 와 묻혔다고 전해지며, 붉은 벽돌로 쌓은 타원형 건물 위에 돔을 얹은 형태다. 현재도 유대교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성지로 보존되고 있다. / 1880년대~1930년

▲ 수도 테헤란 근교의 옛 도시 샤히르레이에 있는 카자르 시대(19세기) 부조. 2,500년 된 고대 유적에 코히누르 양식으로 만든 그림 부조를 모사한 것이다. 이 사진 에서는 왕관 쓴 인물이 양각돼 있는데, 파트 알리 샤 카자르(Fath-Ali Shah Qajar)로 추정된다. / 1880년대~1930년

▲ 같은 부조의 다른 부분이다. 파트 알리 샤 카자르(Fath-Ali Shah Qajar)를 둘러싼 신하 등이 보이며, 문자는 현대 페르시아어어로 작성됐으나 마모가 심해 읽기 어렵다. / 1880년대~193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