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수정 : 2025-06-30 @21:00
1995년, 서울대 학생회관 지하에 나란히 자리한 이발소와 미장원. 이들은 학부생만 2만여 명에 이르는 거대한 시장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는 당시 한국사회의 문화적 전환점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개인의 개성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신세대 문화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이후 한국 패션·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걸친 혁신의 출발점으로 기록되었다.
경쟁의 시작: 미용실의 등장
사건의 발단은 5년 전인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1년 8월 22일, 2학기 개강에 맞춰 오픈한 서울대 구내미용실은 처음에는 여학생과 여직원을 주요 고객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점차 신세대 남학생들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1995년에는 미용실 전체 고객의 70% 이상이 남성이 될 정도였다.

▲ 성업중인 서울대 미용실 / 동아일보 1991.9.16.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작 여학생과 여직원들이 미용실을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미용실 측은 1994년 가을부터 “남자 출입금지” 팻말을 내걸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완전히 역효과를 낳았다. 교내 미용실 출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줄 알았던 남학생들이 오히려 더 몰려든 것이다. 결국 1995년 3월 미용실은 이 팻말을 다시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
이발소의 반격
1975년 서울대 관악캠퍼스 이전과 함께 20년간 독점 지위를 누려온 이발소도 아래와 같은 대책 마련에 나섰다.
- 미용사 고용: 1994년 2명의 미용사를 자체 고용
- 상호 변경: 이름에서 이발소를 뺀 ‘서울대 뉴 헤어’로 변경
- 가격 경쟁: 미용실보다 700원 저렴한 요금 책정
- 규모 확대: 1995년 미용사를 5명으로 증원
- 정체성 변화: 벽면에 ‘미용실’ 팻말까지 부착

▲ 신세대 남학생들이 서울대 이발소에서 미용사에게 머리를 깎고 있다 / 조선일보. 1995.4.13
이러한 전략은 효과를 발휘했다. 이발소 측에 따르면 하루 200여 명의 손님 중 70~80명이 미용사를 찾았고, 특히 대학교 1~2학년생의 80%가 미용사를 선호했다.
또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학생들은 실용적인 자세를 보였다. 한 공대생(21세)의 말은 당시 신세대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었다.
“서로 서비스 및 가격경쟁을 벌이면 소비자에겐 좋은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이발소냐, 미용실이냐를 굳이 따지지 않아요. 자기 마음에 맞게 깎아주는 곳을 찾게 되는 거죠.“
미용실 측은 남학생 손님 때문에 정작 여학생과 여직원이 잘 이용을 안 하게 되자 지난해 가을 급기야「남자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입구에 내걸었다.그러나 이 팻말은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미용실에 절대로 남자들 출입이 불가능한 줄 알고 있었던 남학생들이 오히려 몰려든 것. 미용실 측은 결국 지난달에 이 팻말을 다시 끌어내렸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자, 지난 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줄곧 독점지위를 누려왔던 이발소도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섰다. 면도기로 옆머리를 바짝 밀고 무스로 잔뜩 멋을 내는 신세대 남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지난해 2명의 미용사를 자체적으로 고용했다. 또 미용실의 커트 요금보다 7백 원 정도 가격을 낮춰 차별화를 시도했다.이 같은 이발소의 생존전략은 효력을 발휘, 줄어들던 남학생 고객들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발소 측은 올해 미용사를 다시 5명으로 늘리고, 한쪽 벽면 거울에는 아예「미용실」이라는 팻말까지 붙여놓았다. 이발소 측은 “하루 2백여 명의 손님 중 70~80명은 미용사들 차지” 라며 “특히 대학교 1~2학년생들은 약 80%가 미용사를 찾는다”라고 말했다.이발소의 역습(?)에 대해 미용실 측은 “서로 잘되는 것이 좋은 것 아니냐”며 아직은 워낙 수요가 많아 여유 있다는 반응. 그러나 미용실 측도 조만간 비장의 카드를 내놓을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학생들은 두 머릿방의 치열한 경쟁을 즐기고 있다. “서로 서비스 및 가격경쟁을 벌이면 소비자에겐 좋은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이발소냐, 미용실이냐를 굳이 따지지 않아요. 자기 마음에 맞게 깎아주는 곳을 찾게 되는 거죠.”산뜻하게 머리를 손질하고 나온 한 공대생(21)의 신세대식「흑묘백묘론」이다.서울대 이발소-미장원 ‘머리 쟁탈전’
서울대생들의「머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대 학생회관 지하에 나란히 붙어있는 이발소와 미장원.이들은 학부생만 2만여 명에 이르는「초대형 머리 시장」을 두고 한치의 양보도 없는 고객 유치 경쟁에 나선 것.「머리싸움」의 발단은 5년 전에 일어났다. 당시 서울대 여학생 및 여직원들을 주 고객으로 영업을 시작한 미용실에 신세대 남학생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몇「튀는」 남학생들이 여학생들 틈에 앉아 머리를 다듬었지만 요즘은 미용실 전체 고객의 70% 이상이 남성이다. 서울대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서울대 미용실이「금녀지역」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
– 조선일보. 1995.4.13
역사적 배경: 이발소 몰락의 진짜 이유
이 경쟁의 배경에는 정부 정책에 따른 복잡한 사회적 변화가 숨어있었다.
- 1975년: 장발 풍조 시기, 정부가 미용실의 남성 영업 금지
- 1980년대 초: 미용실 남성 서비스에 대한 신고가 증가, 영업정지 처분 사례 발생
- 1983년: 보건사회부의 절충안 – “미용실은 남성 커트 금지, 이발소는 여성 파마 금지”
- 1983년 예외 조항: 어린이에게는 제한을 두지 않음

▲ 보건사회부의 절충안 / 조선일보. 1983.8.3
또한 1980년대 ‘퇴폐이발소‘의 범람은 이발소 전체의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당시 퇴폐이발소는 말 그대로 사회악이었다. 불법 퇴폐이발소 업주가 구속되어 실형을 받는가 하면, 이용 가격은 1979년 당시 여성면도사에게 4~5만 원의 팁이 주어졌다. 이는 2025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0~40만 원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돈이다.

▲ 서울 이발소 절반이 ‘퇴폐’ / 동아일보. 1984.2.18
💡 퇴폐이발소의 실상
- 서울시내 이발소의 절반을 장악
- 주택가까지 침투
- 1979년 당시 여성 면도사 팁이 4~5만원
- 불법 영업으로 업주 구속, 실형 선고 사례
이때 이용업계를 위해 관계당국은 건전업소 인증제도를 시행하거나 하는 특단의 대책을 세웠어야 하지만, 되려 이발소를 여자면도사를 둘 수 있는 성인전용업소와 청소년업소로 이원화해 운영할 수 있도록 보사부에 관계법규 개정을 건의한다.
당연히 이는 ‘퇴폐영업을 허용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여론의 더 큰 반발을 샀고, 이미 안 좋아질 대로 안 좋아진 이발소의 이미지는 추락의 낭떠러지로 가는 길을 밟는다.

▲ 이발소 이원화 개정안 후퇴 / 조선일보. 1983.7.23.
TV 뉴스에서도 경찰에게 급습을 당한 퇴폐이발소의 밀실영업과 성병(性病) 만연 실태, 어두침침한 조명, 야릇한 옷차림의 여성 면도사가 화면에 나오면서 대중들은 ‘이발소’라는 명칭에까지 거부감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 퇴폐이발소 적발 / 조선일보. 1979.12.4.
이로 인해 어머니들은 어린 아들을 자신이 다니는 미용실로 데려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미용실에 익숙해진 어린이들이 성인이 된 시기가 바로 1990년대였다.

▲ 머리 깎을 곳이 없어진 남자 어린이들 / 동아일보. 1983.2.5.
미용실의 인테리어와 여자미용사가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발사 아저씨에게 머리를 맡기는 것이 더 불편했을 것이다. 서울대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성균관대, 건국대, 한국외대 등도 구내이발소에 여자미용사를 채용하기 시작했고, 이런 분위기는 일반업소로 확산되는 시작점이 되었다.
세대 교체의 완성
서울대학교의 머리 쟁탈전은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고, 신세대 남학생들의 자연스러운 미용실 이용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1990년대 신세대 남학생들의 특징
- 어릴 때부터 미용실 경험
- 여성 미용사와 세련된 인테리어에 익숙
-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 추구
- “면도기로 옆머리를 바짝 밀고 무스로 멋을 내는” 스타일 선호
▲ ‘미용실 세대’ 남학생들 / 동아일보. 1996.11.11.
이처럼 사회 풍조의 변화와 세대 교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머리전쟁’은 사실 이미 승부가 정해진 대결이었다. 성별 고정관념이 무너지자 남성들은 스스로의 취향과 개성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었고, 소비자는 브랜드 대신 ‘실속 있는 서비스와 합리적인 가격’을 기준으로 선택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미용실이 주류로 자리잡는 결말이 예정된 셈이었다.
이후 서울대 이발소의 변천사
이후 서울대 이발소는 손님 유치 싸움에서 밀리다가 2001년에는 학생회관 지하가 식당으로 개조되고 후생관(현 아시아연구소) 3층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손님은 10%로 더욱 쪼그라들어버렸다. 2010년에는 후생관이 사라지면서 이발소는 ‘헤어클럽(현재 상호: 남자 만들기)’이란 이름으로 다시 학생회관 지하로 돌아왔다. 하지만 관련기사에 따르면 손님은 대부분 교직원과 교수들이고 학생은 별로 없다고 한다.
- 2001년: 학생회관 지하 → 후생관 3층 이전 (손님 90% 감소)
- 2010년: 후생관 철거로 ‘헤어클럽(현 남자 만들기)’로 학생회관 지하 복귀
- 현재: 주 고객층이 교직원과 교수들로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