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수정 : 2025-08-21 @23:10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국모(명성황후)의 위엄을 되찾고 황제국의 격식을 대외에 과시하기 위하여 을미사변(1895년 10월 8일) 이후 2년 1개월 만에 거행된 국장(國葬)은 화려한 의장·방대한 인력·서양식 사진기록을 동원한 대규모 의례였다.
아래 7장의 사진은 M. Lévêque(프랑스 해군/공사관 종군 사진가로 추정)가 촬영한 것으로, 명성황후 국장의 세부절차와 공간배치를 서구인의 시선으로 생생히 포착한 기록이다.

▲ 1897년 11월 21일, 홍릉 서측 구릉에 임시로 세운 향로각에 대신들이 모여 있다. 발인 전날 밤 망자의 혼을 부르는 초혼·영신의례 장면이다.

▲ 1897년 11월 21일 정오, 등롱(燈籠)과 깃발을 든 장례 행렬이 홍릉(洪陵)으로 출발하기 위해 대안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반차도(班次圖) 111면(제2책)에 등장하는 그림 속의 실제 인물들이다.

▲ 명성황후 발인 반차도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 경운궁 경효전(景孝殿)에 설치된 빈전(殯殿) 앞에서 관을 성구(聖轝)에 옮기기 전 대기 중인 모습. 관곽이 팔정(八正) 의궤대로 운구대 옆에 놓이고 곡궁인이 곡을 올리는 순간을 담고 있다.

▲ 대안문 앞 행렬. 명성황후의 신주를 실은 신련(神輦) 주위에 호위 문무관들이 정렬해 있다. 노정은 경운궁 대안문→돈의문→청량리 밖 홍릉까지 약 12km의 거리였다.

▲ 돈의문에서 홍릉으로 이어지는 가도에 나와 있는 엄청난 인파. 명성황후의 어의였던 언더우드 여사(Lillias Horton Underwood, 1851~1921)가 1904년에 쓴 『상투쟁이들과의 15년』에 나오는 “(장례 행렬을 보기 위해)길거리에는 수 천명이 몰려들었다”는 묘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홍릉 예정지에 임시로 설치된 아궁·황실 숙영 막사. 이곳에서는 하관준비를 밤을 새워 진행하였다. 명성황후의 국장 장례비용은 쌀 44,300여 섬의 규모로 치러졌다. 이는 현재가치로 약 110억 원에 달한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 p 106)

▲ 장례 직후인 1897년 12월, 덕수궁 내 ‘프랑스 어학교실’에서 조선 왕친·양가 자제들이 프랑스어를 배우는 모습을 담은 사진. 대한제국이 외교·군사 고문단을 초빙해 서구 교육을 장려하던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들의 이름은 민용규(Min-Yong Kiu), 윤덕용(Youn Tok Yong), 김석기(Kim Sok Ki)로 작성되어 있지만, 사진작가가 발음을 들리는 대로 프랑스어 알파벳으로 옮겨 적어서 성씨 외에는 정확한 이름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01.
7 phot. de Corée en 1897, dont celles de l’enterrement de la reine, le 21 novembre 1897, et un portrait de groupe des princes Min-Yong Kiu, Youn Tok Yong, Kim Sok Ki, par M. Lévêque, don 1923